임신한 내가 첫사랑과 마주쳤다.
결국 시누이와 조카들이 갑자기 집에 오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어머니는 남편에게 방에 들어가 잠시 눕고 있으라며 이불까지 챙겨 덮어주셨다. 그리고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임산부는 몸을 많이 움직여야 좋대. 운동할 겸 냉동 꽃게 좀 더 사 와. 내가 재료 다듬어 놓을게.”
막달에 많이 움직이는 게 정말 좋은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말에는 설득 반, 눈치 반이 섞여 있었다.
몸은 무겁고 허리도 결렸지만, 눈치 보며 앉아 있는 것보다는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약 20분쯤 달려 도착한 마트 주차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래도 곳곳에서 가족 단위로 장을 보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커피를 손에 든 여유로운 아내들, 카트를 밀어주는 남편들의 모습이 자동차 유리 밖으로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평범하고 따뜻한 날들이 오길 꿈꾸며, 뱃속 아기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철제 카트를 밀기조차 버거울 것 같아, 차키만 크로스백에 넣고 지상 1층으로 올라갔다.
난방기의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매장을 감쌌다.
‘냉동 꽃게가 어디 있더라?’
두리번거리며 잠시 혼자만의 자유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낯익고 다정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분명 아는 목소리였다.
‘이제 스트레스 때문에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고개를 돌렸다.
대학생 때 만났던 첫사랑, 성민오빠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편안하고 다정했다.
“우리 집 가서 해물찜 해 먹자. 오빠가 살짝 맵게 해 줄게.”
그 옆의 여자가 깔깔 웃었다.
“오빠, 저번처럼 못 먹을 정도로 맵게는 하지 마.”
성민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장난스럽게 여자의 모자 끝을 눌렀다.
“맥주 한 캔씩 마시면서 영화 한 편 보자. 애들 간식도 좀 보고...”
그가 카트를 돌리는 순간, 우리의 시선이 맞닿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겨울 털 슬리퍼, 보풀이 잔뜩 난 임산부 원피스, 색이 바랜 레깅스, 두꺼운 양말.
염색하지 못해 검은색과 갈색이 뒤섞인 머리를 대충 묶은, 산발한 머리.
그 초라한 모습이 냉동고 유리에 그대로 비쳤다.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카트 바퀴 굴러가는 소리, 발자국, 마트의 경쾌한 음악까지.
모두 내 심장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성민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에는 우리 둘만 존재하는 듯했다.
나는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왜 하필 지금?...’ 생각이 스쳤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빈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너무 두려웠다.
결국 부끄러움을 삼키고 다시 차에서 내려 조심스레 냉동 코너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냉동 꽃게를 집어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를 보니, 산발한 머리가 비쳤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빨간 신호등이 눈앞에 번졌다.
아쉽게 끝난 사랑은 늘 더 깊게 남는 법이다.
순수하고 평화로웠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다른 사람의 좋은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다정하고 다툼 없는 그와의 평온한 시절이 새삼 그리워졌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며 웃던 성민과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옆에 있던 여자가 왠지 부럽게 느껴졌다.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있었을까? 결혼은 편안하고 다정한 사람과 하는 것이라는 걸, 왜 나는 몰랐을까?'
쓸데없는 후회가 스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지나간 인연에 연연해서 무엇하랴.
나는 마음을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깊고 선한 눈빛을, 조용히 기억의 서랍 속으로 다시 넣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