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 결혼 후, 진실이 드러나다.

도망칠 곳은 없다.

by 김하루


시댁 거실엔 아직 식지 않은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익숙해질 즈음, 남편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가방을 챙겨 들며, 그의 팔을 부축하며 차로 향했다.


차 문이 닫히자 세상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낮게 깔린 엔진 소리만이 귓가를 울렸고, 차 안엔 눅눅한 술 냄새와 가을의 찬 공기가 섞여 돌았다.

손끝이 떨릴 만큼 피곤했지만, 운전에 집중해야 했다.


그는 옆자리에서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자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볼에 바람이 부딪히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그 알 수 없는 미소에 속이 서서히 타들어갔다.


“문 좀 닫아줘... 춥다.”


말끝이 떨렸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천천히 창문을 올렸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나를 스쳤다. 차갑고, 무심하게.



도로는 젖은 듯 반짝였고, 입김이 서려 시야가 흐릿해 어깨를 경직한 채 손에 힘을 꽉 주며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양말 좀 벗겨.”


짧고 무겁게 떨어진 말.

그 순간, 가슴속 깊이 눌러두었던 울분이 터졌다.


“적당히 해! 내가 너 노예야?
아니면 너네 집 설거지 담당이야?
일주일마다 술판 벌이는 거, 그거 치우는 사람이 왜 하필 나야?
지금 나 만삭이야. 나도 힘들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양말을 벗어 내게 던졌다.


“싫으면 이혼하던가. 어쩌라고.”


순간, 공기가 멈춘 듯했다.

그의 말이 공중에서 퍼져버리고,

나는 서럽게 외쳤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이유가 뭐야? 지켜준다며...

네가 결혼하자고 했잖아. 아이 낳고 우리끼리 소소하게 살자며?”


남편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이렇게 추락하고 볼 거 없어졌잖아?

그럼 네가 수그려야지. 어디서 도도한 척이야? 네가 지금 그럴 군번이야?

나 아니었으면 넌 지금 거지꼴이었어. 우리 엄마도 결혼 반대했었거든?

내가 의리 지킨 건 생각도 안 하냐?”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 방 불을 꺼버리고, 거실로 나와 뱃속 아이를 위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둠이 순식간에 거실을 삼키고,

냉장고의 낮은 웅웅 거림만이 공간을 메웠고,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날개를 잘라 새장에 가두고 이제서는 날아가 버리라는 비겁한 남편.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남은 건 절망 속에서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일뿐이었다.


‘아기 태어나면 달라질 거야... 술에 취해서 저런 거겠지... 아니야, 우리 아기랑 도망갈 거야.’

수많은 예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창문 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내 얼굴을 스쳤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그 틈에서,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문득 지하철에 임산부 전용 좌석이 있다는 사실이 스쳤다. 임산부가 왜 사회의 약자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keyword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7화7. 잡은 물고기에 밥 안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