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하자 2-2 무리뉴 덕후, 축구해설가 되다
Avengers, Assemble.
- 스티브 로저스 -
두 번의 방송 리허설을 통해 내 다섯 살짜리 노트북으로는 도저히 고화질 중계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방송을 담당하는 카페 운영진과 아프리카TV PD님은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도 슬기롭게 대처해주셨다. 아프리카TV에서 고성능 컴퓨터를 대여해줄 것이고 그전에는 아프리카TV 본사가 있는 판교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 시즌 동안 함께 경기를 중계할 분과도 인사를 나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 카페에서 ‘캐스터’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성우를 해도 좋을 훌륭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리허설을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혼자서 2시간 가까이 방송을 이끌어나가기가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TV의 정책은 중계진 두 사람이 각자 한 경기씩 돌아가면서 중계하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예산 때문이었으리라. 캐스터님과는 함께 중계할 날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사비를 지출하더라도 내 차례의 방송에서 옆자리를 든든히 채워줄 지원군을 찾았다. 아무래도 한 명보다는 두 명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팬들도 평소 해설자와 캐스터로 역할이 나뉜 두 명이 중계하는 것에 익숙하고, 방송 경험이 부족한 나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다면 든든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내 주변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여러 후보 중에서 가장 먼저 레이더에 포착된 것은 아직 10대였지만 훌륭한 콘텐츠로 가득한 축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얼굴도 꽤 귀엽게 생긴 ‘이타’였다. 이타는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스포츠 콘텐츠 회사에서 운영한 ‘축구 기자단’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친구로, 주말에는 같은 팀에서 공을 차는 사이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해박한 축구 지식이 중계에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경기 상황을 전달하고 짚는 캐스터의 비중을 많이 가져가고, 이타와는 전술적인 부분을 짚어주는 해설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우리가 그린 그림이었다.
편파중계 첫 경기에서 유나이티드를 상대할 팀은 같은 프리미어리그 클럽인 크리스탈 팰리스였다. 당시 팰리스에는 대한민국 국가대표인 이청용 선수가 뛰고 있었는데, 그가 경기에 나서게 된다면 한국 선수를 응원하면서도 경기 결과는 맨유가 이기길 바라는 아주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될 예정이었다.
데뷔 중계는 판교에 있는 아프리카TV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실제로 보니 크로마키의 배경이 되는 초록색 천, 여러 대의 모니터와 방송 장비 등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이타는 나보다 훨씬 더 긴장되는 모습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타는 유나이티드가 아닌 에버튼 팬이었고, 그 사실을 자신의 블로그와 여러 축구 커뮤니티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혹, ‘유나이티드 팬도 아닌 사람이 유나이티드 편파중계를 하네?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될까?’, ‘그 상황에서 이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앞으로의 중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방송에 참여한 유나이티드 팬들 또한 해설자가 타 팀의 팬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지 않았고(사실 내 생각보다 이타는 덜 유명했다.), 이타는 지금껏 써온 수준 높은 칼럼만큼이나 멋진 해설을 이어나갔다.
경기 결과도 환상적이었다. 유나이티드는 무려 4:0으로 팰리스를 꺾고 승점 3점을 챙겼다. 모든 골이 2~30분 간격으로 터진 덕분에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우리 또한 90분 내내 흥겹게 방송할 수 있었다.
판교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즌에 편파중계를 시작한 맨체스터 시티, 리버풀, 첼시, 토트넘 등의 중계진도 같은 건물의 옆 스튜디오에서 각자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팬 커뮤니티 회원들과 함께 나눴다.
스튜디오를 몇 차례 더 오간 뒤 아프리카TV로부터 방송 장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판교에서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올 필요가 없었다. 방송국 정책이 바뀌어 캐스터님과의 2인 합동 방송도 성사되었다.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었다.
인터넷 방송국에는 ‘매니저’라는 개념이 있다. 그들은 채팅장 관리 등 BJ가 실시간으로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들을 돕는다. 일종의 모니터링 요원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의 편파중계 방송국에서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닉네임 ‘흐니에스타’, 애칭 흐니였다.
흐니는 내가 예전에 다녔다던 스포츠 콘텐츠 회사의 인터넷 방송국 열혈 시청자였다. 당시 회사 방송은 회당 시청자가 10명에서 30명을 오가는 귀여운 규모였는데, 그중에서도 축구선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연상시키는 닉네임 ‘흐니에스타’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와는 이후 서로가 운영하는 축구 블로그를 통해 교류하면서 친해졌다.
흐니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내 책에 그의 인터뷰를 싣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당시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로 상경해서 해설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닌 *꿈을 키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는 나의 인터뷰 취지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 몇 년 뒤 흐니는 내가 일했던 스포츠 콘텐츠 회사에 입사했다.
인터뷰를 통해 그의 열정과 포부를 알게 되면서 비록 인터넷 방송국이지만 그가 우리 방송 매니저를 맡아준다면 그에게도 유의미한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무려 맨유와는 숙명의 라이벌인 리버풀 팬이었지만 이번에도 팬들은 아무런 편견 없이 매니저 흐니에스타를 맞이해 주었다. 그도 최선을 다해 방송을 도왔다.
몇 주 뒤에는 시청자 한 명이 방송국에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며 쪽지를 보냈다. 로고와 배너 등을 디자인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임규현’이라는 실명을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그의 정체는 이타보다도 한 살 어린 고등학생 팬.
그를 물리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고 무엇이든 좋으니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전했다. 규현은 방송에 필요한 여러 가지 디자인을 제작해 선물하는 한편, 열혈 시청자로 활동했다. 놀랍게도 규현만이 우리의 편파 방송 스태프 중 유일한 유나이티드 골수팬이었다.
흔히 말하는 짬밥, 아니 방송 경력이 늘면서 축구 중계방송에도 여러 가지 장치와 게이미피케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태프 회의 결과 열혈 시청자들에게 작은 경품을 주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축구 굿즈와 책을 나누는 한편, 스폰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흐니처럼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축덕 마켓’ 김 대표가 생각났다. 축덕은 ‘축구 덕후’라는 뜻이기도 하면서 그가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의 이름이었다. 김 대표는 흔쾌히 자신이 정식으로 수입, 판매하고 있는 굿즈와 용품을 방송에 협찬하기로 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방송에서 그의 쇼핑몰 홍보를 돕기로 했다. 그는 유나이티드도, 에버튼도, 리버풀도 아닌 런던 클럽 아스널의 오랜 팬이었다.
종인, 캐스터, 이타, 흐니에스타, 규현, 축덕으로 이루어진 축덕 어벤져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 여섯 명은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어느덧 성인이 된 이타, 규현과 술잔을 기울일 때면 시간이 참 징그럽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