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하자 2-2 무리뉴 덕후, 축구해설가 되다
편파중계한 경기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2018년 4월에 열린 리그 두 번째 맨체스터 더비다. 이 경기는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라이벌 클럽이 맞붙는 더비 매치라는 것 외에도 여러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두 팀은 6경기만을 남겨둔 프리미어리그에서 1위(시티)와 2위(유나이티드)에 올라 있었다. 시티는 남은 리그 경기에서 2승만 거두면 자력으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만약 이번 경기에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이기면 다음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리그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경기는 시티의 홈에서 열려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반면 유나이티드는 라이벌의 우승 확정을 저지해야만 했다. 이미 자력으로 우승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이 더비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꺼져가는 리그 우승의 불씨를 조금 더 살려 둘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이번 더비는 단두대 매치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경기였다.
경기 날짜가 다가올수록 팬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중계를 준비하는 나와 캐스터님도 마찬가지였다. 유나이티드가 경기에서 패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유나이티드는 이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반드시...
그러나 경기는 우리의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25분 만에 시티의 주장인 뱅상 콤파니에게 헤더골을 헌납했고, 그로부터 5분 뒤에는 미드필더 일카이 귄도간이 아름다운 터닝 슈팅으로 유나이티드의 골망을 흔든 것이다. 분위기는 단숨에 시티 쪽으로 넘어갔다. 추가 실점 없이 전반을 마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편파중계를 보기 위해 방송국을 찾아온 유나이티드 팬들은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속상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팬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선 중계자로서 실의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과연 후반 45분 동안 무리뉴 감독과 선수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지 지켜보자.”며 팬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 짓고 말겠다는 강력한 목표 의식, 그리고 홈에서 두 골을 먼저 넣은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를 꺾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유나이티드는 선수 변화 없이 후반전에 임했지만, 선수들의 자세는 달라져 있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적극적인 압박과 공세에 나선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패배하면 리그 우승의 불씨는 그대로 사라지고 2:0으로 지는 것과 3:0 패배는 숫자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달라진 유나이티드의 경기력은 편파중계방 팬들의 태도도 바꾸어 놓았다. 전반전에 제대로 된 슈팅조차 하지 못했던 유나이티드가 후반전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53분, 유나이티드는 용기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동료 안데르 에레라의 가슴 트래핑 패스를 받은 유나이티드 미드필더 폴 포그바가 침착하고 정확한 오른발 슈팅으로 만회골을 넣은 것이다. 그로부터 채 100초가 지나지 않은 55분에는 윙어로 출전한 알렉시스 산체스가 골문으로 침투하는 폴 포그바에게 로빙 패스를 보냈다. 포그바의 헤더가 다시 한번 시티의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경기는 2:2 동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반까지만 해도 침울하기 짝이 없었던 팬들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고, 팬들의 활기에 힘을 얻은 우리도 덩달아 신바람을 냈다. 게다가 아직 경기는 30분 넘게 남아 있었다. 분위기는 이제 완전한 유나이티드의 것이었다.
69분. 상대 진영에서 얻은 프리킥 상황에서 키커로 나선 알렉시스 산체스가 상대 골문으로 정확한 패스를 보낸다. 공은 골문으로 침투하던 유나이티드 수비수 크리스 스몰링의 오른발 앞으로 정확히 배달되었고, 이를 스몰링이 논스톱 발리슛으로 연결하며 역전 득점에 성공. 3:2. 이제 리드는 유나이티드의 것이다.
이후 2~3분 동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 장면만 조각처럼 남아 있는데 역전 골이 터진 순간 내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과 그 점잖던 캐스터님이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한동안 고조된 목소리로 중계했던 것 등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가 어땠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유나이티드는 경기 막판까지 이어진 시티의 파상 공세를 골키퍼 데 헤아의 슈퍼 세이브와 수비수들의 육탄 방어로 막아낸다. 골대를 맞추는 불운까지 겹치며 시티는 동점에 실패. 종료 휘슬이 울리며 역사에 남을 역전승을 거둔 유나이티드는 시티에게 시즌 첫 리그 홈 패배를 선사했다.
맨체스터 더비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유나이티드는 이어진 34라운드에서 강등권에 위치한 웨스트 브롬위치 앨비온에게 거짓말 같은 패배를 당한다. 이로써 2017/2018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은 맨체스터 시티로 확정. 하지만 이후 5경기에서 3승 1무 1패를 거둔 유나이티드는 리그 2위를 차지하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획득한다.
무리뉴 2년 차를 보낸 유나이티드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맨체스터 더비에서의 기적적인 승리를 포함해 리그 2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고, UEFA 슈퍼 컵과 잉글랜드 FA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시즌이 한창이던 2017년 말. 나는 서울에서 완도로 거처를 옮겼다. 홈리스 월드컵 이후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친구가 있는 완도에서 한 달을 지냈던 것이 계기였다. 2018년에는 서울살이를 완전히 정리했고 맨체스터 더비를 포함한 프리미어리그의 후반기 경기는 서울이 아닌 완도에서 중계했다. 나는 어느덧 30대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