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나는 리듬
1986년, 햇살이 귤껍질 일 때
친구들과 쭈그려 앉아서 '달고나'먹기 참 좋은 날씨다.
그런데 엄마는 건국대에서 무슨 일이 있다며,
매운 고춧가루가 날아다녀서 집에 붙어있으라고 했다.
달고나처럼 설탕가루가 날아다녀야지 알 수가 없다.
엄마가 쉬는 날이라 삼호 악보 낱장을 사 오셨다.
난 마루에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콩쥐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엄마는 제사 차례 지내듯
양배추 넣은 식빵에 정성스레 케첩을 뿌린 접시를
피아노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스르르륵' 가신다.
끝날 때까지 그 냄새만 맡으면서 치는 건
병풍을 쳐놓고, 약 올리는 차례상 음식과도 같다.
그걸 미끼로 엄마와 나는 침묵의 거래가 완성된다.
무뚝뚝한 엄마가 사주신 악보를 보면서
베토벤처럼 눈을 쓱 감고 미간을 쪼이고 치면
그때만큼은 친구들 엄마처럼 흐뭇한 미소였다.
난 엄마 때문에 '밤안갯속의 데이트'를 쳐야 했다.
데이트라고는 TV에서 나오는 광고 밖에 모르는데.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살짝궁 데이트~'
그래도 눈이 파랗고, 마가린 색의 머리카락.
그 소피마르소가 나오는 '라붐' 주제곡을 치면은,
심장이 멜랑꼴랑해지고 신비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엄마는 나의 신밧드 모험을 무시한 채
채은옥 아줌마의 '빗물'을 치라고 하셨다.
악보를 받아보고선 눈치껏 곡을 파악했다.
'자~빗물이라니까 물이 흐르게, 방정 떨지 말고'
어른들 눈높이에 맞춰서 분위기를 잡고 치다 보면
엄마는 부엌으로 슬그머니 가셔서 우는 것 같았다.
' 울지 말라고! 나도 아빠 보고 싶다고...'
나는 식빵을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다.
엄마가 계속 울면 따라 울지도 모르니까.
난 숫자 공부보다, 콩나물이 1층부터 5층까지
이사 다니는 게 더 흥미로웠다.
너구리 오락처럼 콩나물 쫓아다니면서
건반을 누르니까 박진감 넘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캬! 내가 치는 소리에 나도 반하겠는데
엄마는 오죽하실까?
이것이야말로 용돈 100원 인상해주셔야 한다.
이 고난의 페달이 끝나면 숨도 안 쉬고 식빵을 먹는다.
늘 운이 좋은 오빠랑 남동생에게
나보다 식빵을 더 가져다주나 감시하면서.
아이루달아
우리 엄마는 알고 보니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셨어.
갑자기 생계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지금은 참... 따뜻하셔.
햇빛이 덜 익은 귤색으로 변할 즈음에
유수지를 따라 걷다 보면 나보다 얌전하고 이쁜
내 친구 고바우 집에 놀러 간다.
" 바우~야 노~올자"
" 주뚱~왔어! 들~어와"
우리는 공부랑 노는 것도 좋아해서 죽이 잘 맞았다.
그날도 고바우는 피아노를 쳐달라고 했다.
"네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뭔가 달라"
고바우는 귀가 제대로인 것 같았다.
바우가 듣기 좋게 손가락을 발레 하듯이.
바우는 그럴 때마다 바닥에 누워서 감상했다.
그러다가 바우 큰 오빠가 방에 들어오셨다.
오빠는 삐까 번쩍한 춤을 추는데 신세계였다.
무술은 아닌데도 공중에서 팔이 흐느적거리고
발과 허리는 리듬에 맞춰 탁탁 치고 빠지는데,
바쁜 호떡집에서 손님에게
호떡을 내주고 다시 반죽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 우와! 가르쳐주세요"
" 하하 그뤠? 허슬춤이라고 해 "
속으로 빨리 외우기 시작했다.
'허슬 허슬 허슬 ⋯'
바우랑 나는 벌떡 일어나서 따라 했다.
와 된다! 김완선 언니랑 박남정 춤보다 더 강력하고
신나는 춤이었다.
거기에다가 나풀거리는 손가락을 슬로 모션한다.
다섯 손가락을 부채 피고 접듯 '촥촥' 추가했더니
날아다니는 파리도 얼씬 못할 인간 파리채 같았다.
" 오 예! 딱 내 춤이네"
집에 와서도 화장실 갈 때 허슬춤이 튀어나왔다.
"정신 사나워 그게 뭐니!!"
역시 엄마랑 나랑 안 맞는다. 예술을 모르시는 것 같다.
그땐 왜 그랬을까
엄마는 예술도 예수도 좋아하셨는데.
지금은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를 저보다 잘하셔요
이렇게 꺼내보니, 그때의 저는 철이 너무 없었네요.
다음날 바로 학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바우는 우렁각시처럼 구경만 하고 난 허슬춤을 췄다.
손을 올려서 손목에 온갖 기운을 쏟고
앞뒤로 반짝반짝 별이 빛나듯 돌린다.
발은 장난감 병정처럼 박자를 맞춘다.
아싸라비아! 역시 내 생각대로 요술공주 쎄리춤만큼
친구들은 환호하고 좋아해 줬다.
난 멋쩍은 척하며 이 기세를 몰아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얘들아 점심시간 끝나고 우리 개뼈다귀 놀이하자"
점심 후 운동장에 모여서 분필로 개뼈다귀 모양을 크게 그렸다.
어릴 때는 왕짱구. 고무줄놀이지만 고학년이라
부루마블처럼 크게 넓혀야 한다.
편을 나눠서 이긴 팀이 개뼈다귀 모양을 지나가고
진 팀은 못 지나가게 방해해서 밀면 끝이다.
간단한 놀이지만 무언가를 뚫고 지나가는 건 신났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쥐어짜며 전력 질주 해야 한다.
눈치를 살피고 암컷 호랑이 소리를 뱃살에 힘주고
'으웨~하핫'
상대팀이 약간 겁먹을 때 타이밍을 보고 우악스럽게 뛴다.
얌전한 친구들은 무식하다는 눈빛으로 멍하게 서있는다.
난 작전이 먹혔다는 쾌감에 개뼈다귀 놀이를 좋아한다.
흙먼지와 땀, 산발머리 범벅 돼서 집에 가면
"넌 여자애가 운동장에서 뒹굴다 오니?
오늘부터 네 빨래는 네가 빨아 입어!"
이럴 줄 알았다. 신데렐라 계모처럼 구박만 할 줄.
난 재미없게 생긴 무궁화 빨래 비누가 싫어졌다.
오빠랑 동생이랑 차별하는 것 같아서.
그 뒤로 옷장 틈 사이로 더러운 옷은 꼬라박았다.
엄마는 플레쉬맨도 아닌데 잘도 찾아내서
고무장갑 낀 손으로 나에게 삿대질하면서 혼냈다.
무궁화 빨래 비누 냄새는 나쁜 냄새다. 흥~끝!
아이 루달아
세 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더니 시집가서야 고쳤어.
그래도 허슬춤을 열심히 춰서 막춤은 자신 있게 살았어.
세상에 모든 것은 각계 리듬이 존재하나 봅니다.
음악, 눈치, 효도, 반성도.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