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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랬을까

15. 김밥 먹는 날

by 루달


1986년, 오란씨 날씨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은

오늘따라 눈 빛이 비상했다.


"반장 인사해 "

"차렷! 열 중 셋!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자 너희들 다음 주 수요일 소풍 가는 날 정해졌다"

"야~호! 아싸리비아~콜롬비아!"



"조용조용! 가정통신문 부모님께 꼭 갖다 드려"

" 저요! 저요!! 선생님 그날 비 오면 소풍취소예요?"

" 너는 비 걱정 말고 실내화 좀 자주 빨어!"


우리는 자잘한 속사정 없이, 교실은 완전 축제였다.


드디어 소풍 전날밤.
가방은 이미 두 시간 전에 쌌는데,
혹시 과자가 이탈했나 싶어서

또 열어보고 또 닫고.


새 신발을 신을 생각만 해도 발이 간질거렸고,

엄마가 비상금을 3000원을 주실지 계산하고,

김밥이랑 사이다가 만나는 장면으로 입이 먼저 들썩였다.


불 끄고 누웠는데도 또 시작이다.
비 와서 취소되면 어떡할지,
분수대 도착하면 얼마나 시원할까?
보물 찾기에서 1등 상품은 뭘까?
한 칸도 안 쉬고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하나님 제발 잠 좀자게 해주세요'

그러나, 신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이불을 한 번 더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 설렘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김밥 향기가 나를 유혹했다.
부엌 가서 김밥 끄트머리만 잽싸게 먹어치웠다.


장소는 어린이대공원이었다.

학교에서부터 그곳까지 전교생이 걸어갔다.

6년 동안 주구장창 단골코스였고,

지나가는 아줌마들은 우릴 보고 부러워하는 눈치 같다.


입구 근처에서 신문지에 돌돌 말린

번데기랑 소라도 이쑤시개로 쿡 찍어 먹었다.

그 맛에 내가 바로 넘어갔다.

'벌써 돈 다 쓰면 안 되는데...'

소풍날의 대공원은 늘 난리였다.
큰 문 옆으로 포장마차가 줄줄이 붙어 있고,

내장 없는 잉어 모양의 '뽑기'

문어발과 쥐포가 타오르는 냄새는

그냥 공원 전체를 먹어버렸다.


왼쪽을 보면

솜사탕 아줌마가 돌돌 도리면서 "이리 와"불렀고,

오른쪽에는

보기 힘든 광택의 큰 풍선들도 바람 따라 불렀다.

아이들은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곤 했다.

문 위의 초록 기와가 얼핏 절집 같아 보여,
괜히 더 웅장하게 느껴졌다


가운데 철문은 활짝 열어졌고,

우리가 줄줄이 들어가자 바로 분수대가 보였다.

물줄기에 신이 나서 자동가속으로 뛰어갔다.


호루라기는 ‘삑’ 울리고
선생님이 단체 사진 찍자고 손을 흔들었다.


오른쪽 작은 길을 쭉 걷다 보면

연두색 잔디밭이 쫙 펼쳐졌다.


돗자리 펴고 짐 내려놓고,

각 반끼리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흥에 못 이긴 아이들은

'숭구리당당' 춤을 췄다.

요구르트 한잔씩, 걸쭉하게 걸친 듯했다.

나를 포함해서.



첫 순서가 수건 돌리기!

나는 뒤통수에 레이더를 달고 앉아 있었다.


근데 문제는,

내가 수건을 애들 등 뒤로

슬쩍 놓고 튀는 장면이었다.

눈치 제로인 난, 말을 해버렸다.


“어이! 놓았다!”


입만 열면 게임 룰을 박살내고...

애들은 황당해서 한심한 듯 바라봤다.


거기다 혼자 바람 일으키며 뛰다가

넘어질 듯 말 듯 호랑나비로 엉켰다.

간섭무늬가 보일 정도로 이상한 생명체 같았다.



이젠 장기자랑 시작이 됐다.

선생님이 큰 카세트를 들고 와서 ‘딸칵’ 틀어주셨다.


첫 타자는 남자애가

'배삼용 헐렁이춤' 광기로 발사했다.

선생님은 입을 가려 버려서, 웃는 건지 슬픈 건지.


그리고 내 차례. 배삼용에 밀리기 싫었다.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무반주로 노래하려니

음 삑사리 나고 춤은 어설프고.

애들 반응은 거의 환호성 폭격이었다.



진짜 목적인 김밥 시간이 돌아왔다.

돗자리를 펴자마자 판이 갈렸다.


부잣집 애의 도시락은 둥근 3단,

바나나까지 금빛으로 누워서 포즈를 취했다.


나머지는 전부 네모 은박지통에

노란 고무줄 둘둘 묶인 현실용 도시락들.


뚜껑을 여니 김밥들이 한쪽으로 쏠렸고,

시금치랑 당근은 스크류바처럼 꼬였다.


난 분홍 소시지보다 햄으로 뽀대 나는

친구 껐도 슬그머니 먹었다.
앗! 선생님 드리라던 김밥 한 통도

손이 먼저 가버려서 다 흡수해 버렸다.


그 순간 난, 부끄러운데 행복한… 이상한 존재였다.


이제 소풍의 꽃, 하이라이트다.

보물찾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수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돌덩이 밑까지 들춰보고,

거의 사실상 수사반 팀장급으로 굴었다.



키 큰 애들은 나뭇가지 들고

지하벙커 찼듯 조심조심 훑고 있었다.


근데 뒤에서

“찾았다!” 소리 들리는 순간,

'망했다!' 멘털은 바로 다이빙했다.


그 뒤로는

휴지·개미만 손등을 점령했고,

결국 풀냄새랑 허망함만 남았다.


그래도 그 난리 끝에 자유시간이 열렸다.

애들은 청룡열차로 돌진했다.

나는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쯧~.



목마를 타고 싶었지만 내 체중은

어른과 아이의 중간이라

관리요원이 고개를 저었다.


팔각정 1층이 매점인데,

이미 소라·번데기 다 사 먹어서 잔액 빵원.

왠지 억울했다. 이유도 모르겠는데.

결국 동물원으로 걸어갔다.

원숭이까지 약 올리는듯했다.


'에라~ 반사!!'



해가 오란씨빛으로 내려앉을 때쯤,

후문으로 우리는 '꾀죄죄' 한채 걸어 나갔다.

언니·오빠들이 다니는 학교 건물이 보였고,

김밥 냄새 빼고는 홀쭉해진 가방을 들고 집으로 흘러갔다.


녹초가 된 낙지처럼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엄훠! 너 전쟁터 갔다 왔니?"

"⋯⋯?"

"오늘 재밌었어? 선생님 김밥 드리고?"

"⋯⋯"

" 야!! 그럼 돗자리는 챙겨 왔어?"

"⋯..."

"너 이리 와!!!"

파닥! 등 한 대 맞고 슝~~ 내 방에 숨었다.


소풍은 항상 출발이 제일 좋았다.

돌아오면 괜히 말이 줄었다.

늘 그렇듯...




그래서

지금은 ⋯


날마다 소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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