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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랬을까

16. 마구간의 빛

by 루달


1986년, 호빵색 하늘


'메미~~ 일 무욱!! 찹싸~~~ 알 뜨억!'


찹쌀떡 파는 아저씨의 종소리가

친근한 계절이었다.



집 앞에 교회를 갔다.

우리 교회는 사모님이 교사 출신이라 그런지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전부 ‘교사력 만렙’이었다.

선생님들이 애들 한 명씩, 아주 촘촘하게 챙겨줬다.


성탄절 한 달 남기고,

우리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뮤지컬을 준비하게 됐다.


학생들 분위기 보고 바로 캐스팅이 떨어졌다.

진짜 예수님처럼 생긴 애는 예수,

성깔 있어 보이는 애는 가롯유다,

조용한 애들은 대사 없는 병사,

신사임당 이미지는 마리아,

키 큰 애는 본디오 빌라도,

나는… 배 나온 헤롯왕.


마리아와 빌라도역은

좀 늦게 도착한다고 했다.



선생님들은 자세히 배역 설명을 해주고

대사본을 복사해서 나눠줬다.

중간중간 조명, 음향까지 깔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문제는 내 대사였다.


“예수 너를 만나보니 매우 기쁘다~”


여기서 ‘예’ 발음이 안 됐다.

선생님이 “예~~~” 하면

나는 “애~~~.”

“루달아, 예!”

“얘~~~~.”


근데 대사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두 살 아래 아이는 죽여버려!"


내가 성격이 급해서

" 두 사라라레"

" 두 살 아 래!"

" 두 사라라 래"


내 귀엔 맞게 들리는데

입만 열면 틀리다고 하셨다.

내 발음 때문에 시간이 길어져서 미안했다.


결국 발음은 포기하고, 그냥 하기로 합의할 때

마리아와 빌라도 역할들이 동참했다.



그러다 연습 중,

예수를 끌고 나가는 병사들이 퇴장할 때

조명이 깜빡이는 장면이 있었다.


그 부분에서 내가 갑자기

로봇 춤을 추기 시작한 거다.

흥이 차올라서 본능적으로.


선생님들은 빵 터졌다.

그리고 바로 결정됐다.

“그거야! 그 부분 춤 넣자 "

그렇게 즉흥적으로 대본이 바뀌었다.

나는 광기 헤롯왕이면서

춤으로 분위기를 뒤집는 역할까지 맡게 됐다.


성탄 2부 예배 날.

발음은 여전히 ‘애수 너를…’였다.

조명이 깜박거리고 음악이 나오자

나는 로봇 춤을 흔들어 재꼈다.


갈보리 언덕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그 짧은 순간을 내가 다 잡아먹었다.


그날, 그렇게 첫 무대 맛을 본 애였다.

발음 대신 춤으로 때운 건데,

사랑받는 작은 헤롯왕이 돼 있었다.


성탄절 전야제가 끝나면 새벽송 돌기!
교회는 갑자기 야간작전 부대가 된다.

11시쯤, 교회에서 모두 따뜻한 떡국을 주셨다.


‘제대로 삥 뜯어오라’는 미끼는 아니고,

날이 추워서 든든하게 먹으라는 거였다.

열댓 명씩 조를 짜서 큰 자루 하나 들고,
선생님 한 분이 인솔하셨다.

그땐 골목마다 다 주택이어서
떠드는 소리와 초만 켜도

금세 나와 문을 열어주셨다.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캬~눈과 버무린 캐럴송 울림.

이 노래 두 곡이면

어른들도 눈물 흘릴 법했다.

우린 프로 사탕 수집단, 그 자체였다.


성도님들은 바로 나와서

초코파이, 산도, 맘마 캐러멜… 뭐든 넣어주셨다.


얼굴 빨개진 우리의 볼을

손으로 감싸주면서

“메리 크리스마스~!”

" 집사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이러면 그냥 천국 온 기분이었다.


자루가 과자로 터질 것 같아지면

그걸 끌고 교회로 복귀했다.

근데 진짜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선물 교환식.


500원~1000원 사이로

각자 포장해서 가져온 선물을

커다란 상자에 쌓아두고

번호표를 뽑는다.


두구두구…


운 좋으면 열쇠 달린 일기장.

간혹 새마을금고 쓰여있는 수건,

제사상에 올리는 사탕.

신문지에 싸인 무궁화 빨랫비누도 있었다.
완전 로또는 큼직한 곰인형이었다.

그리고,
큰 유리병에 종이학 접은 거.
내 선물을 열어 본 뒤 표정은 어떨지,

그걸 누가 받을지...


유다역을 맡은 애였으면

30원에 팔아넘길까?

앗! 마리아역을 맡았던

혜숙이가 가져가서 다행이었다.


선물도 사람에 따라, 주소 찾아 가나보다.

난 빨랫비누였다.

'엄마 드려야지'


그렇게 몸과 마음이 누을 틈 없던,

성탄절 준비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실컷 수다 떨다가 불이 꺼졌다.


잠은 안 오고

깜깜한 베개 사이로

친구들의 눈빛들만


빛나던 성탄절이었다.


공유의 빛, 스스로의 빛

모두가 빛이었던

그때의 조명이었어요.


요즘 날씨가 훅 추워졌습니다.
이 계절이 오면

발음이 자꾸 엇나가고 그렇네요.


모드드들… 감기 애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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