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운수 좋은 날
"계란이 와써요 계란이! 계란 팔아 요~으~악!"
계란 파는 아저씨의 익숙한 소리가 퍼지면
엄마 심부름을 나가기도 했었다.
1986년, 구슬빛 하늘.
점심 종만 울리면 친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시락 관람 하러
내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다.
책상 위에 도시락 ‘탁’ 올리는 순간,
의자 끌고 와 옆에 붙는 애까지 등장.
그리고 뚜껑 여는 그 1초…
단체 리액션 파티가 터졌다.
“어후 엄마는 김치 뚜껑을 꼭 안 닫지?”
“또 계란말이네”
“콩자반 또야?”
"헉 젓가락 빠뜨렸다."
"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젓가락은 서로 바통터치하듯 돌려 썼다.
웬일인지 비엔나를 싸 온 아이가
"루달아 너희 집 계란말이는 진짜 맛있어"
계란에 영혼을 말아버려 질린 나였지만
" 그래? 난 별로인데... 네 비엔나가 좀 맛있긴 해"
비엔나 가져온 애 얼굴에서
부잣집 루트가 잠깐 켜졌다.
우리는 말 안 했지만 속으로 같은 생각이었다.
'야… 제네 아빠 월급 탔나 보다 '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집으로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엄마가 집에 계셨다.
난 기분이 좋아져서 입술로 노래했다.
" 넌 여자애가 뱀 나오게 휘파람을 부니?"
".....?"
"손톱 좀 깎어! 연탄 팔다 왔어?"
"......?"
난 짧게 호흡을 뱉은 뒤
"맨날맨날 계란말이라 창피해!"
" 난 네가 더 창피해! 목에 때봐!"
"아니 목주름으로 숨어있는데 어쩌라고?"
"......?"
바로 신문지 두장과 큰 멸치를 갖고 오셨다.
"멸치 똥 좀 까라"
" 오빠는 왜 안 시켜? 그러니까 손톱이 까맣지!"
" 오빠는 장남이잖아 이런 거 만지는 거 아냐"
장남만으로도 모든 게 특혜였었다.
담날 등교 전
현관문 앞엔 도시락통이 세 개.
그날따라 뾰족한 느낌이 내려왔다.
후다닥~ 내 거와 오빠 도시락 뚜껑을 열어봤다.
"어랍쑈?"
오빠 도시락 밥 위에만
비엔나가 숨겨 있었다.
비엔나 칼집 하나씩 들어갔을 뿐인데,
갑자기 상류층 느낌이 났다.
이 참에 서둘러 동생 거도 열어봤는데!
오빠랑 똑같았다.
뒤통수로 외계인 레이저 맞은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에 엄마 오시면 싸워야겠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학교에 왔는데
아뿔싸 ~오늘이 'BCG 예방 접종' 불주사 날이었다.
애들은 벌써부터 안절부절 얼어 있었다.
혜연이는 화장실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얘들아 불주사 진짜 불로 지져! 난 절대로 안 맞아"
" 난 피부에 알코올 솜 닿으면 두드러기나"
"루달아 그럼 너도 안 맞겠네?"
" 당연 빠다지!"
드르륵 문이 열리며
흰가운 입은 두 분이 들어오셨다.
알코올램프 불에다 주사를 소독하시고는
"오늘 주사는 끝번호부터 맞을 거야"
'아니 왜? 몸무게 순서야?'
난 대꾸 한마디 없이
실내화를 질질 끌고선,
선생님께 알레르기를 말씀드렸다.
곧 알코올솜으로 테스트를 하시더니
"팔뚝 쭉 올려"
" 으흐흐~~ 앗!"
BCG주사가 불로 지진다고 했던 신혜연은,
결국 도망가서 안 맞았고
난 첫 번째로 맞았다.
그렇게 땅바닥만 보며 집으로 왔다.
근데 또 집에 엄마가 계셨다.
" 우와~엄마 일 안 나갔네! 매일 집에 있어라~"
"응..... 그게"
" 왜? 뭔데 그래?"
"직장에서 그만두라고 했어."
엄마는 갑자기 말이 빨라지면서
"나랑 같이 일하는 주방장 아줌마가 나 답답하다고"
코를 몇 번 시큰 거리시다
훌쩍거렸다.
늘 엄마가 울면,
화난 파도가 심장을 치는 것 같아서
따라 울게 됐었다.
" 내가 남편이 없다고 다들 무시하는 것 같아"
엄만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또 그러셨다.
" 엄마! 새아빠 만들어 난 괜찮으니까"
" 떽!!! 큰일 날 소리 하니? 고모들이 욕해"
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울다가 멈췄다.
'맞다! 오빠 도시락 비엔나 숨긴 거 싸워야 하는데'
아까 했던 말들도 궁금하기도 해서
다시 부엌으로 갔다.
"엄마 나 주워왔어!! 도시락 반찬 왜 차별해?"
갑자기 고무장갑을 벗으시더니
내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급하게 앉으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저... 네 방에서 친구랑 같이 잘 수 있니?"
" 친구? 누구? 집 수리한데?"
"저... 저기 너랑 같은 반 OOO 있잖아"
" 알지 알지~그 애는 왜?"
"그 집 아빠랑 애들 셋... 우리 집에 함께 살려고"
난 빈틈없이 바로 답해드렸다.
"알았어 엄마 맘대로 해"
" 그래 확실히 딸이라 엄마를 이해하는구나"
"흠... 그래 "
그날부터는 식구가 8명.
한 달 뒤,
짐 싸서 다시 나갔다.
문득 계란이 스칩니다.
닭은 알을 보내고,
알은 엄마 얼굴도 못 본 채 떠나죠.
누가 더 불운할지
보내는 쪽인지, 떠나는 쪽인지.
소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와는 달리,
연속적인 불행으로 느낀 날은
사랑의 그림자로 남아있습니다.
그날을 지나가게 한 힘은,
울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지켰던
용기와 배려 같습니다.
돌아보면
운수는 결과보다
어떻게 건너왔는지에 달렸다는 걸.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