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날 잡은 날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이문세의 노래가 골목에 흐르고,
세상모르는 우리들은 그곳에 있었다.
1986년, 누룽지 빛 하늘
오늘은 토요일이라 4교시 밖에 없다.
친구들과 작정하고 노는 날이다.
몸풀기식으로 '얼음 땡'을 하기로 했다.
이건 그냥 놀이가 아니라,
지구 멸망 직전의 시간정지 실험이었다.
얼음! 하는 순간
단체로 약간 전기 먹은 것처럼 굳는다.
다리 반쯤 들린 채 멈춰서 허벅지 후달달.
우리는 눈 흰자만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경지까지 멈추는 데에,
신묘한 자부심을 갖었다.
손가락은 이상한 각도로 접혀서
'나 건드리면 법적 조치 들어간다?'
위협하는 자세였다.
입도 반쯤 열린 채
숨 쉬는 중인지
단체 버그인지 모를 포즈.
흔들리는 시선까지 쪼여놓고
모아이 석고상 마냥 굳은 척.
모두가 레드카펫 밟아야 할
연기 수준이었다.
바람은 부는데 머리카락만 얄밉게 흔들리고,
인터넷 렉 걸린 듯했다.
그러다 땡! 하면?
다 같이 똥개 풀린 듯 튀어나가고,
조상님들까지 같이 뛰는 공기였다.
국민학생인 우리 에너지를
그 0.5초 포즈 하나에 갈아 넣는
짜릿한 집중력 놀이였다.
얼음 땡 고수들한테
'무궁화 꽃이 피어 떫니 닷!'
이건 그저 호떡 먹기만큼 쉬웠었다.
우리는 이미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 랏!"
꼬맹이 시절,
기초부터 갈고닦았기에.
이제 얼음은 다 녹았고
본격적으로 다방구를 시작한다.
"다방구~!' 외치면
갑자기 동네 엔딩보스 난장판으로 바뀐다.
술래가 발 하나 턱 올리면,
우린 단체로 영혼 빠져나간
식빵 얼굴이 된다.
달릴 땐 관절 나간 장난감처럼
양발 따로 놀고,
팔은 사이렌처럼 돌아갔고,
모두가 살아 있는 행성들이었다.
그 행성들도 작은 충돌은 있었다.
누구도 벽을 안 닿았는데,
닿았다고 욱여쌌고
술래는 또 속아주며⋯.
다방구는 체력이 아니라 오기로 버티는 종목이라
우린 국가대표처럼 뛰었다.
숨을 헐떡거리는
그 와중에
멀리서
“뻥이요~~~!”
큰 소리가 나면,
단체로 눈빛이 또렷해지고
'지금이다, 튀어!'
서로가 무언의 작전 신호.
아까까진 술래 피하던 애들이
3초 만에 뻥튀기 아저씨 쪽으로
성지순례하듯 돌진한다.
그리고 그 순간
“펑!!!”
공기까지 흔들릴 소리가 터지면
누구는 귀 막고 점프하고,
안 놀랜 척 인기관리하고,
나는 공중에 떠있는 옥수수 냄새에 빠지고.
아저씨는 또 능숙하게
“뻥이요~” 한 번 더 외치며,
드럼통 같은 데서 거더 기를 확 풀었다.
우리는 떨어져 나온 뻥튀기 조각을
주워 먹느라 야생의 본능이 튀어나왔다.
다방구는 어디로 갔는지 기억도 안 나고,
결국 뻥튀기 소리 하나에
운동장 절반이 이동하는
이상한 단체 심리가 있었다.
뻥 소리보다 더 빠른 게 우리들이었다.
얼굴은 상기되었지만
아직도 체력은 들썩 거렸다.
운동장 분위기는 이미 과열돼서
누구든 뭐만 외치면 줄이 생겼다.
" 사방치기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운동장은 이미 낙서판이었고,
돌멩이 하나에
우주의 기운을 모으며 던졌다.
열기가 식을 즈음,
또 외친다.
"제기 차기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제기를 차는 건지
주문을 거는 건지
온갖 근육들이 요동쳤다.
이 상승기운을 몰아서 작정하고 부서 버리듯!
" 말뚝박기 할 사람 따라와"
밥은 이럴 때 쓰라고 먹는 거였다.
말뚝박기의 묘미는 초토화.
남자애들이 두 손 두 발 들었을 때
난 여유 있게 외쳤다.
"오락실 갈 사람 여기 붙어라~"
'어랏? 나 혼자네?'
여자 애들은 공기 하러 가고,
남자 애들은 자치기 하러 갔다.
어디선가 누룽지 냄새가
나를 부르면,
그제야 배고파서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는 날 보자마자
" 너 어디서 땅 파고 왔어?"
'⋯⋯?'
"너 내일 헌금하라고 준 돈은?"
"오락실에서 다 잡아먹었네..."
"야!! 이 느무 지지배 커서 누가 데리고 갈지!"
'⋯⋯?'
난 시집 안 가기로 굳게 각오했다.
' 내일은 뭐 하고 또 놀까?'
아이루달아
네가 시집을 안 간 게 아니라
애초에 너는 원래 밖으로 나도는 쪽이다.
남자 때문에
울고불고 뒤집어지던 시절?
그건 그냥, 몸속에 뜨겁게 돌던 계절이었어.
다 지나갔다.
요즘은 뛰어놀고 싶어도
무릎이 먼저 파업부터 해버렸어.
그래도 가끔은
그때 그 미친 에너지 끌어다가
휘파람 한 번 시원하게 불고 싶다.
너의 광기로 충전되던
그 시간의 배터리를 꺼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