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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랬을까

19. 직장인만 바빠?

by 루달




국민체조 시~이 쫙!


핫, 둘, 셋, 넷, 다섯

둘, 둘, 셋, 넷 ⋯ 옆구리 운동~!


우리는 그날도 학교 운동장에서 체조를 했었다.







1986년, 바나나 껍질 빛 월요일


아침부터 국민 체조 하는 날이다.

이백 년 묵은듯한 장독대 스피커는

'지지직 깨지직' 그 소리만으로 피곤이 반쯤 왔다.


우리들은 잠이 덜 깬 건지,
몽유병에서 탈출하지 못한 듯 일렬정리돼 있었다.


국민체조 음악 귓가를 향해,

군대 팡파르식 연주로 돌진했었.


빠라바라 밤 빠라바라 밤

국민체조 시이 ~쨥!

헛. 둘. 셋. 넷. 다섯 ⋯ 여더~얼!

둘. 둘. 셋. 넷⋯⋯ 숨쉬기운동!


훈련병처럼 촥촥 맞추다가

옆구리 운동 들어가면,

허리는 꼭 45도에서 콩팥까지 쪼이듯 멈추고


느닷없이 양쪽 친구들과 눈이 마주쳐버린다.


'어우 불편해'



우측엔 금방 찢어질 것 같은

만두피 텐션으로 목을 돌리고,
좌측엔 눈알이 빠질 것처럼 힘주니,
막 알에서 튀어나온 공룡 같았다.


노젓기 전신 운동 구령이 나오자
양팔은 따로 회전했다.
오른팔은 배를 구출하고,
왼팔은 인생을 놓아버리고.
몸은 한 명인데 사는 방향은 둘.


전부 환생 실패한 표정으로 팔만 흔들었다.

나는 그림자 뒤에 딸려가듯 멍 때리고.

아침부터 강제로 주어진

민방위 훈련급이 끝나고 계단으로 몰려갈 때!

완전 초미니 러시아워였다.


'어후 모닝 요구르트 먹을 시간은 줘야지'


첫 교시부터 산수 수업이었다.

숫자만 보면 몸속 5장 6보가
단체로 줄행랑치려는 듯 꿈틀대고,


분모 분자만 나와도

좌심실, 우심실이 먼저 짐 싸고 탈영하는 느낌이다.



'네모 안에 알맞은 수를 쓰시오'

네모? 그 안에 알이 맞았다고?

머릿속은 지진 경보 주의단계에서 상향되고 있었다.


연필로 팽이 놀이를 해도

당장 이 궤도를 이탈해서 우주로 튕겨 나가고 싶을 뿐.


주변 애들은 갈릴레이처럼 계산하며,
거룩하게 생존하는 중이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지?’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
내 안에서 내가 한 바퀴 꼬였다.


‘루달아… 정신 건강을 위해 산수는 때려치우자.’
속에서 누가 귓불 잡아당기듯 속삭였다.


그래! 이번 생에는 산수랑 인연 없으니 잠 충전!
친구들 방해 안 하려고 구석에 조용히 수그렸다.



주번 담당이 서울우유 급식 상자

톡 하고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바람개비처럼 달려가 붙었다.

그런데 개수가 모자랐었다.


2교시 도덕 시간이 됐다.

이 시간만 되면 왜인지 모르게

허리를 자동으로 곧게 세우게 된다.


선생님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이 말만 나오면
‘나 오늘 뭐 잘못했지?’ 자동 검색부터 돌았다.

그 짧은 50분만큼은

단체로 착함 코스프레에 강제 진입하는 시간이었다.


3교시는 국어시간이다.

교과서를 펼치면
철수와 영이는 늘 눈동자가 죄다 검은색 두 개였다.
감정이란 게 삭제된 채로.


6학년이다 보니 '쓰기'시간에

기름종이를 대고 따라 쓰는 건 심심했다.


멋진 지팡이처럼 연필을 휘둘러보고,

궁서체로 써보고 싶은 이상한 욕구가 생겼다.

‘세종대왕, 보고 계신지요?’



교실은 방금 전까지 인간 드론 떼처럼 떠다니다가,
선생님이 드르륵 등장하는 순간!
전원이 우당탕탕 책상으로 굴러가듯 제자리 착석했다.


4교시 자연 시간이 됐다.
나는 자연인답게,
미리 까먹은 점심의 여파로 졸다가 땡! 수업 끝났다.


점심시간에는 매점으로 질주해 컵라면을 후루룩!


앗! 5교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시간이다.

학교 대표였던 터라 어깨에 힘 꽉 들어갔다.

같은 반 친구 이모가 홍대 서양화과 재학생이라,

비밀리에 특별 과외까지 받았었다.


엄마는 전문가용 수채화 세트를

아낌없이 후원해 줬다.

난 담보대출받은 심정으로 몰입했다.



첫 스케치 구상을 잡을 때가 제일 흥미롭다.
전체 대충 맞추고, 물감 섞는 재미도 느꼈다.
마지막 명암 한 점을 때려 넣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냥 해류에 떠밀린 해삼처럼 나아갔다.


6교시에는 음악이다.
제목은 ‘노을’이라는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풍금 반주를 맡겼다.



노을?'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손가락 모양도 모락모락 하모니에 얹었고,

아이들은 이 노을에 타들어갈 듯 노래했다.

음악 시간은 늘 이유 모를 진심이 폭발하던 시간….


6교시 땡 치자 애들은 가방을 질질 끌며 탈출했지만,

그때부터 내 진짜 ‘야근’이 시작됐다.


첫 코스는 이상하게 어른 냄새만 나는 미술 화실.

부담스러운 눈빛의 아그리파 석고상은 멀뚱.

나는 월요병 근로자처럼 고뇌에 끌려갔고,

애들이 모르는 그 세계로 저당 잡혔다.



다음은 피아노 학원으로 외근한다.

선생님이 말하길

“이번 콩쿠르 끝나면 선화예중 준비해 보자.”

국민학생 심장에 직격탄을 꽂았다.


성가대 호출은 더 급했다.

반주 언니가 시집가서,

갑자기 불려 나온 학예회 대타가 돼버렸다.

자리만큼은 과장급이었다.


그 주 토요일, 여의도 콩쿠르!

큰고모가 검정 드레스를 사주셨다.

회색 프로 스펙스 양말, 검정 단화.


무대에서 나만

보람상조 분위기였다.


다른 참가자들은 요정옷, 반짝이는 구두.

그러거나 말거나. 칫!



그렇게

포 잡을 뛰었다.

우리들도 나름 고생은 많았다.

그러나


야근 수당

자두사탕 한 개,

급여는

우유 한 병뿐이었다.




육체와 마음을 모두 쓰며

시간들을 건너왔네요.


삶의 저녁 무렵에 이르자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작은 자유를 운행 중입니다.


사계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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