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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랬을까?

20. 방구합니다.

by 루달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오동통통 쫄깃쫄깃 농심 너~어~구리

88 올림픽 공식 라~면

TV에서 '너구리' 광고가 나올 때였다.






1986년, 덜 익은 자두 오후


옆집의 라면 냄새가 창문을 타고 밀려왔다.


' 엄마 엄마! 우리도 너구리~끓여주세요'


엄마는 큰 냄비에 라면 5개를 끓여 왔다.

늘 오빠가 좋아하는 맞춤식으로,

푹 삶은 면, 파, 계란 투척.


오빠가 그걸 뿌듯해하며

쪽쪽 후루룩 빨아먹는 모습이 얄미웠다.


'저 인간하고 겸상을 하지 말자'



그렇다고 안 먹을 나는 아니었고,

더 필사적으로 먹어댔다.


국물 없는 짭조름 맛을 좋아하는데,

어휴... 라면물을 냅다 부어서 끓이셨다.

나한테 원한을 부은 건지, 해파리를 삶은 건지.


또 그렇게 계란을 풀지 말라고 애원을 했것만,

엄마는 꼭 구름폭탄처럼 풀어버렸다.

복지리탕 거품 씹는 것 같아 별로였다.


'아… 이 사람들하고 나랑 안 맞아'


고개를 휘저으면서 단념하곤 했었다.


TV채널 주도권도 오빠한테 있어서

프로 야구를 보게 되었다.

오빠, 동생은 1번 타자부터 9번까지

달달달 정신 사납게 외워댔다.

이만수김봉연, 누가 홈런왕이 될지도 떠들면서.


난 라면을 엎드려 먹어서 그런지,

뱃속이 자이드롭 타듯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를 문질문질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가 “뿡.”
의도가 불순한 소리였다.
오빠는 TV 보다가 눈동자만 매섭게 굴렸다.



두 번째는 살짝 일어나서 한발 띄었는데 “뿡.”
나머지 발 한쪽은 마루에 본드 붙은 듯 얼었다.


이젠 수문을 막아보려고 단전호흡까지 했건만!


세 번째는 그만 방향 감각을 놓쳐서

뒤를 돌며 “빵.”


야구 방망이 공치는 소리까지 삼켜버리자,

오빠, 동생은 나한테 채널을 맞췄다.

심지어 오빠는 안테나 세우듯,

귀가 자발적으로 접혔다가 펼쳐졌다가...



네 번째부터는 통제 불능 지경이 됐다.
리듬을 터득해 버렸지만, 뇌와 몸이 엇박자였다.

에라~! 잔뜩 숨어있는 것들을 풀어 버렸다.


한 발 디딜 때 “뽕”
돌아서며 “뿡”
살짝 점프하며 “뽀뽀↗”



내 방귀에 호기심과 애정을 담듯,
오빠는 응원하며 두 주먹을 쥐었다.

동생도 따라 하며 미간과 함께 힘주더니,
결국 소파에 고꾸라지며 웃었다.


' 어랏 이게 웃겨? 좋았어 가즈아!'


나는 마지막 필살기로 쥐어짰다.
팔을 하늘로 번쩍 들며
“뽕↗~~~~~~~~~~~~”

드라이버로 천장을 뚫듯 날카롭게 피날레!



오빠와 동생은

감히 넘보질 못할, 경이로운 눈빛을 보냈다.


엄마는 과일을 갖고 오면서


“저 지지배 드러 주거 써 그냥 싸라 싸 ”


오빠는 배 잡고 기어가며 웃었고,
동생은 거의 울먹이며 뒹굴렀다.


나의 10 연타 궁둥이 휘파람으로

우리 가족은 2년 만에

하나가 되어 실컷 웃었었다.

.

.


2년 전이였다.

1984년 3월 2일 늦은 눈이 많이 오던 날,

아빠는 평상시처럼 운전하시고 출근하셨다.


그날 저녁 우리 삼 남매는

'3840 추격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검은색 전화기가 '따르릉따르릉' 울었고,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하얘졌었다.


" 네???"


다리가 풀어지더니 휘청거리셨다.

갑자기 신발을 꿰차듯 신고선,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의식불명에서

단 한 시간 뒤에 사망하셨다.

나의 하나뿐인 아빠가.


그리고는 우리가 너무 어리다며

장례식장도 안 데려갔고,

개학 첫날부터 학교도 갔었다.


고요조차 소음인,

그저 텅 빈 .

그곳에서 셋이 버티고 있었다.

죽음은 이별이라서 슬픈 거라고만 알았다.

가까운 하늘나라로 잠깐 간 거라고...

그때의 눈물샘은 삼 남매를 피해서 숨어 버렸다.


그날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은,

기억에서 통째로 삭제돼 있었다.


그렇게 부재된 1년을 업고 지냈었다.

다음 해 아빠 1년째 제삿날이자 개학 첫날을,

기억 속으로 박제해 버리게 됐다.


"아빠 없는 사람 손 들어봐?"


' 나 아빠 없지 근데... 왜 나만 없지?'


손을 올려야 하는데 천근만근.

귀부터 정수리까지 올리는데도 거리는 멀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내가 부끄러웠다.


그 잔인한 날부터 또 6개월 동안,

통째로 백지상태가 돼버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1986년 6학년부터의 시간들은

더 또렷하게 사진 찍은 듯 남게 되었다.


어른들은 내가 어리니까 모를 줄 알고,


“글쎄 눈 오던 날이었대.”
“삼청동 쪽에서 사고가 났다더라.”
“아이가 무단횡단 건너는 거 피하려다가,

빙판에 미끄러져 난간을 박았다 대"

"영안실에 갔더니 눈뜨고 죽어있었대"

그 말들이 퍼즐처럼 들렸지만
내가 맞출 수 있는 조각은,

아빠가 외동딸이라 많이 사랑해 준 거였다.


내 발을 자기 발등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추던 사람,
대공원에서 내 손을 잡고 길게 걸어주던 사람.
63 빌딩도 마지막으로 같이 갔던 곳이었다고,

시간에 그을린 사진들만이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난 학교에서는 애들에게 더 과하게 웃겼고,
집의 정적들은 모른 척하려고 노력했다.
어른들이 “성격이 밝아졌다”라고 말하면,
그게 칭찬인 줄 알고 더 크게 웃었다.


그렇게 점점 눈치만 봤고,

곰벌레처럼 버티려고 했었다.

그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호흡이었다.



웃음이 밝을수록 내가 조금 더 괜찮아질 것 같아서.

그 시절의 나에게 방 하나가 필요했다.

조용히 울어도 되는 마음의 공간,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하지만 어린 나는 그 방을 찾지 못했고,

그 방을 찾기 위한 몸부림 중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그 기억들은

조용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걸.



마지막...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진 아빠에게,

이젠 용기 있게 안부를 꺼내본다.


'지금은 아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어.

그리고... 나 잘 버티고 살아'



방구했고,
방(房)을 구하며...

지금도 내면의 방을 구하려 글을 씁니다.






20회 '방구합니다'를 끝으로

'그땐 왜 그랬을까'시리즈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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