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빗속에 팽이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그 찢어진 우산은 내 모습이었다.
"비 나리는 거리에서 그대 모습 생각나~"
비만 오면 '빗속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승을 떨곤 했었다...
1986년, 시멘트 빛 하루
그날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왔다.
엄마는 현관문 앞에서
" 너는 이 우산 들고 학교가 또 잊어버리지 말고!"
" 으그... 알았어"
" 그리고 끝나고 일찍 와 김치 부침개 해줄 테니까"
" 네? 알게 씁니다! 어무이 "
내가 상습적으로 자주 잃어버려서
엄마가 파란색 비닐로 된
대나무 손잡이 우산을 준 것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홀라당 뒤집혔고,
들고만 다녀도 눈에 띄어서
범죄자 식별 수준이었다.
나무 손잡이에 붙은 녹슨 쇠고리는
펼칠 때마다 손가락을 찌를 듯 아팠다.
그럼에도 그 우산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해준 김치부침개를 먹어야 하니까.
그 비닐우산을 들고 등굣길에 나서면
아이들의 뒷모습은 걸어 다니는 크레파스 같았다.
노란 우비에 원더우먼 장화까지 신은 애들도 있었다.
나는 애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산 끝으로 조금만 방심해도 눈을 찌를 것 같았다.
그래서 겁먹은 채 얌전히 뒤에서 따라갔다.
선생님은 평소
“우산 쇠 끝으로 장난치면 벼락 맞는다”라고 했다.
적어도 내 우산은 나무라 그런 걱정은 없었다.
아이들과 보슬보슬 새살 거리다가
도로 위로 차가 슝 지나가면
아스팔트에 고여 있던 물이 우리 쪽으로 ‘촤악’ 튀었다.
“우~와! 하하하!”
우비 입은 애들은 난리 났다.
물 한 번 맞는 게 마치 선택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영광이라도 되는 듯.
나는 파란 비닐우산 하나 들고 있었고
물세례를 정통으로 받았다.
운동화까지 젖어 양말은 거의 해산물처럼 눅눅해졌다.
좀 있으신 분의 자제분들은
쨍한 장화를 신고선,
물 웅덩이마다 첨벙첨벙 들어갔다.
알라딘의 양탄자 타는 애들 같고, 난 지니...
‘나도 비 올 때 엄마 슬리퍼를 신고 와야겠다.’
교실에서는 빗물이
창틀 사이로 또-뚝, 또-뚝
요정들이 얼음 땡 치고 가는 듯이 들려왔다.
괜히 차분해져서 연필을 잡고
연습장에 세련된 언니들을 그려댔다.
수업이 끝나고
비만 오면 자주 잠실대교를 건너갔는데
그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다리만 건너면 잠실 주공 아파트가 있었다.
전학 간 혜숙이네 집이다.
너무나 시원한 비,
인적 없는 다리 위에서 '빗속에서'를
몇 번 불러 재끼면, 금세 친구네 집이었다.
아파트는 현관부터 금고문처럼 쇠문이었다.
"오~부자라서 역시 다르네"
그러다 밥을 먹었는데
반찬이랑 구성 보자마자
‘아… 부자도 결국 콩자반을 먹는구나’
또한, 엄마가 한 것보다 충격적으로 더 맛있었다.
문득 시계를 봤는데, 앗! 6시였다.
밥만 먹고 인생 절반 날린 느낌이었다.
나는 급하게 인사하고 집으로 가는데,
입구를 잘못 빠졌는지
계속 걸어도 잠실대교가 안 보였다.
'다리가 전학 갔나?'
그래도 그냥 직진했다.
점점 불안이 심해지니 발 스텝도 꼬여갔고,
어둠 속에서 정신이 젖어버린 느낌이었다.
밤은 깜깜하고 비는 내리고 쉬는 마렵고
차들만 훅훅 지나갔다.
'어! 이쪽 방향이 맞는 거 같은데 아닌가?'
계속 걷다 보니 TV에서 아시아게임 때 봤던
큰 우주선 모양이 보였다.
이건 우리 동네가 아님을 확신했다.
길 가던 아줌마한테 여쭤봤다.
" 아주머니 잠실대교가 어느 쪽이에요?"
“어머, 여긴 영동대교 쪽이야. 집이 어디니?”
“자양동이요.”
“안 되겠다. 전화번호 말해봐. 공중전화 저기 있네.”
“446-1170이요.”
아줌마는 공중전화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와 통화를 하시곤,
“얘, 아줌마가 택시 잡아줄 테니까 너는 집 가면 돼.”
나는 아줌마가 잡아준, 연두색 택시에 올라탔다.
집 앞 '취미 양복점'에 도착하니
엄마가 이미 나와 있었다.
택시비 이천 원을 내고, 잔돈은 안 받으셨다.
엄마는 나를 끌고 집으로 왔다.
“너! 여자애가 밤에 왜 쏘다녀!”
“혜숙이네 갔다가… 길 잃어버렸어…”
잔소리가 이어지다가
엄마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
“내가 누구를 보고 살아야 하는지 힘들다…”
그리고 울었다.
나도 오래 참고 오던 게 터져서 같이 울었다.
우리 둘은, 드라마 재방송 보다가
또 운 사람들처럼 괜히 서로 따라 울고 있었다.
내 방에 들어가자
엄마는 김치부침개를 내밀었다.
혜숙이네서 밥 먹었지만 모른 척하고 또 받아먹었다.
세 장째 먹으니까 엄마가 피식 웃었다.
“싸돌아다니니까 배고프지.”
나도 괜히 따라 웃었다.
“엄마 김치부침개 최고~!”
그러자 엄마가 문득 물었다.
“근데, 우산은? 가져왔어?”
“… 택시에 두고 내렸네…”
" 내가 이놈의 지지배땜에 못살아!!"
엄마 얼굴에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시곤,
방문이 ‘쿵’ 하고 닫혔다.
오늘의 엔딩 크레디트이었다.
그 뒤로는 혜숙이네도 안 갔고
잠실대교도 안 걸었다.
'그때 아주머니 짱 고마웠는데...'
그래도 비는 좋았다.
비가 그치면
무지개 색을 하나씩 고를 수 있으니까.
방향을 잊어버릴 때
나이테가 되어준 아줌마
고로쇠의 물 되어준 엄마
그 역할들이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철’이란 입장이 바뀌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마음.
저는 계속 철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