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꽃 피는 연못
1986년, 물들인 봉숭화 날씨.
'개구리 소년 난나나 ⋯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꽃이 핀단다.'
TV 앞에서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 넋 빠져 있던 나.
투투의 딸 ‘아로미’ 모드로 흠뻑 취해 있는데,
남동생이 갑자기 ‘구슬치기!’ 외치며 구슬을 내 쪽으로 날렸다.
" 누나 구슬 좀 이리 줘"
한 두 번 이야지,
계속 휙 튀어 오고 또 던져 주고.
등골에 바람구멍 날 판이었다.
그러더니 오빠까지 리코더로 끼어들었다.
"미 솔미 라솔미레미 삑~ 라 도라 레도라솔라 삑~"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를 국룰처럼 불러대는 두 인간.
오빠, 동생, 그냥 다… 다 짜증 났었다.
독수리 오 형제가 아니라,
독한 것 삼 형제한테 포위된 기분이었다.
이놈의 집구석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내 전용차 갖고 놀이터로 탈출했다.
큰 고모가 '스카이 씽씽'을 한 대 뽑아준 것이다.
친구들은 어디선가 거센 바람을 밀고 나타난 날 보며
" 루달아 이리 와 같이 고무줄 하자"
" 얘들아 알았어! 기다려 잠시만"
나는 씽씽이를 안전하게 주차하고
전력질주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우리들은,
"얘들아 오늘은 이 강산 침노하는~하자!"
"아니야 오늘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고~하자!"
" 싫어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하자!"
"그럼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하자!"
"그냥 샘물이 솟는다 퐁퐁퐁 하고 순대 먹으러 가자"
말투는 조용해 보이는데 죄다 시끄럽고 정신없었다.
우리는 한 줄로 서서 고무줄을 팽팽하게 발에 걸었다.
그리고, 참새 떼처럼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
바닥을 콩 찍고, 탄력 받자마자
오른발로 고무줄을 머리끄덩이 잡아채듯 끌어다 놓고,
왼발로 트위스트 돌리듯 줄을 건넜다.
장화와 홍련처럼 머리 땋은 애는
“야 재미없어! 딱따구리 하자!!”
분위기를 엘리베이터 층수 바꾸듯 확 갈아엎었다.
우리는 발을 쪼르르 빠르게 튕기며
“딱! 따! 구! 리! 구리구리 마요네즈"
리듬에 맞춰 외쳤다.
고무줄판엔
딱따구리 열 마리가 뛰노는 것처럼
애들 전부 깔깔대며 흥이 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는데
뭔가… 녹녹했다.
"너 뭐 ⋯묻었어"
좀 아는 애 같았다.
"뭐가? 도대체 뭐야?"
좀 모르는 애 같았다.
"왜 그러는데 어디 아파?"
좀 근처도 못 간 애 같았다.
" 헉! 나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 "
좀 창피한 나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오빠, 동생 다 짜증이 났다 싶었다.
나는 급하게 스카이 씽씽을 몰고 집으로 달렸다.
엄마는 마루를 닦다 말고
내 치마 뒤를 보고 놀래셨다.
" 어머! 너 그러고 밖에 돌아다녔어?"
" 아냐! 놀다가 금방 이렇게 됐어"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 그리고 너… 천 기저귀 해"
" 뭐? 그리고 저번달에는 안 그랬는데 왜 그래?"
" 넌 나 닮아서 양도 많은 거야. 내가 다 삶아줄게"
잠시 후
엄마는 가방에서 천 기저귀를 꺼내 주시며,
" 며칠 전 막내 고모 아가 낳았데.
아기 기저귀 선물하려 했던 거야"
" 딸 이래 아들이래?"
" 딸 이래. 얼른 옷 갈아입고 같이 갔다 오자"
막내 고모가 아이를 낳은 것과
내 몸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궁금한 게 많았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옷을 다 갈아입었다.
불편했지만, 결국 우리는 고모네로
아기를 보러 갔다.
세상에나, 너무 작은 사람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겠는 얼굴.
아기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들꽃 냄새처럼 퍼졌다.
살아 있는 생기가 바로 뚜껑을 연 느낌이었다.
말랑한 피부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도, 젖은 숨 같은 리듬…
그게 쓱 스치며 내 몸에 묻어오는 듯했다.
고모는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라고 했다.
내가 자주 목에 때가 껴서 그런 줄 알고선,
" 고모 아기 이름 뭐야?"
" 복둥이"
" 복둥아 복둥아 ~ 후루루 까껑!"
"⋯⋯"
" 고모! 고모 봤어? 복둥이 나보고 웃었어"
" 그만해 애 경기 일으킨다고!"
고모는 내 기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그냥 심통이 났다.
" 고모 왜 저번에 나한테 안 가르쳐 줬어?"
" 뭘 여시야!"
"두 번째 하면 양이 많아지는 거. 다 묻히고 다녔어"
고모는 당황하며 말했다.
"나처럼 양이 적으면 딸 낳고,
너는 커서 아마 아들 낳을 거야!"
"진짜? 그리고 복둥이 너무 좋아"
" 나 닮아서 이렇게 이쁜 거야"
"고모 나 복둥이 보러 자주 올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도 이모들도
첫째는 아들인 걸 보고 이해가 갔다.
아니, 솔직히 고모 말에 세뇌당했다.
'난 아들을 낳을 몸이야'
아들은 좋은 거라 생각해서
기분 좋게 집으로 갔다.
그렇게
무지개 연못에 꽃이 피어났다.
아이 루달아
시간이 흐르고
고모는 딸만 넷 낳고
넌 진짜 아들 낳았어.
추억이라는 게
막상 다시 꺼내보면
그날 들었던 노랫말,
누가 외친 한 줄,
고무줄 튕기는 냄새,
그거 딱 한 줌만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