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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그랬을까

10. 멍든 종이학

by 루달


1986년, 소리가 퍼지던 날씨



' 나 너를 곧 사랑을 알고 종이학 슬픈 꿈을⋯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


그럼 내 몸도 천 번 접으면 봉황새가 되려나

아님… 쿠팡 로켓 날개라도 달리려나

종이학의 슬픈 사연? 이 생각나서 빈정댑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종이학이 유행이 아니라

거의 신흥 종교에 가까웠다.

나도 그냥 접지 않으면 뒤처지는 줄 알고

필사적으로 접어댔다.


정사각형 색종이를 딱 깐다.

사각형이 삐뚤면 그 즉시 종이학이 아니라

종이재난이 탄생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접는다.


종이 한 장으로 학을 탄생시키는 데,

괜히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접다 보면 숨도 아껴 쓰게 되는 수준의 집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열중했으면 노벨… 아니다.

아마 손가락에 침 묻히다 걸려서 상 박탈됐을 거다.



그날, 전에 마니또였던 친구가

짜장 즉석떡볶이를 사주겠다며 날 불러냈다.
가던 길에 '미리내' 잠깐 들르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세상에, 그곳은 문구점이 아니라 거의 보물창고였다.


예쁜 인형이랑 스탠드가 반짝거리고 있었고
난 그냥 숨만 쉬어도 사고 싶은 게 넘쳐났다.

친구는 쇼핑백 예쁜 걸 하나 골라 들고,
가방에서 투명한 델몬트 유리병 같은 통을 꺼냈다.


그 안에는 무지갯빛 종이학이 가득 들어 있었고
목에는 분홍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그 상태로 떡볶이집에 갔는데,
중학생 오빠 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우리 친오빠보다 백 배는 멋있는 두 남자였다.



" 안녕, 먼저 짜장 떡볶이 시켰어. 라면 사리 먹을래?"

"네!"


친구는 새초롱 해서 젓가락만 끄적일 때

난 먹는 게 남는 거 다식으로 먹었다.

거의 다 먹을 즘 한 오빠가 말을 걸었다.


"루달이 먹는 게 참 귀엽네 "

"⋯⋯ "


그때 귀가 살살 녹는 바나나킥 같았고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먹으면서 슬금슬금 오빠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냥 잘 생긴 게 아니라 웃는 모습도 멋있었다.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내 젓가락.

입술근육도 따로 놀듯 떡볶이 넣는 것도 어색했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심장이 뛰지?'


그때 그 오빠가 냅킨을 뽑고 나에게 건너줬다.


"루달아 입 닦으면서 먹어"


옆에 친구랑 다른 오빠가 막 웃었다.


'왜 웃지? 저 오빠는 나한테 친절한 건데?'

난 먹기만 해도 웃긴가 싶었다.


그렇게 먹고 친구랑 집에 가는 길에


" 나한테 냅킨 줬던 그 오빠.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지?"

"홍홍홍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난 모른다는 말을 긍정의 말로 착각했다.


집에 와서도 그 오빠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그 오빠한테 첫눈에 반한 걸까?

사랑이 냅킨을 타고 오는 장면만, 반복 재생하였다.



나도 친구 따라 종이학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허파 볶음 사 먹으려 모은 돈을 갖고,

'미리내'로 달려가서 새로 나온 종이학

반짝이 종이도 사고 리본도 샀다.


하지만 유리병과 쇼핑백 살 돈이 모자랐다.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번쩍!


'이거다. 엄마한테 치과 갔다고 하면 돈 받을 수 있겠는데?'


얼마 전 엄마가 내 어금니 빠졌다고

치과 가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확인하는 건

딱 하나, 빠진 자리 모양.

그걸 속이면 끝이었다.


나는 집으로 달려와 씹던 껌을 뱉어서

빠진 이빨 자리에 조심조심 눌렀다.

내 이빨 구멍이 그대로 찍혔다.



그 껌을 살짝 떼서 냉동실에 넣었다.

얼리면 더 새 이빨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렇게 종이학 유리병 하나 때문에

내 생애 첫 거짓말 프로젝트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길 기다리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드디어 현관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나는 바로 돌진했다.

“엄마… 나 드디어 치과 갔다 왔어… 돈 좀 줘.”

엄마는 잠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늘 치과 갔다 왔어? 새 이빨 하는데 얼마래?”


" 어? 그러니까 이빨 새로 하는데 만원이면 끝난데"


" 뭐? 어금니 이빨 새로 하는데 만원밖에 안 한데?"


" 웅. 만원만 주면 새 이빨 넣어 준데. 낼 가야 해"


"........"


엄마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눈도 껌벅거리지도 않고

내 눈만 또렷이 쳐다봤다.

그 시선을 피해 내 눈동자는 도망 다니고.
엄마 표정은 굳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신발장으로 가더니 빗자루를 꺼냈다.

“너 일루 와!"

그 말 톤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다.

‘아… 작살 나겠다.’


보행기 타고나서 처음 당하는 수준의 매운맛이었다.
무릎 있는 데까지 피멍이 돌 정도로 진짜 제대로 맞았다.

너무 아파서 계속 빌다가 또 맞고...


"잘못했어요! 앗! 엉엉 다시 안 그럴게요. 앗!"


"너 왜! 어디서 배웠어? 엄마가 그렇게 가르 쳤어!"



맞다가 지쳐서 내 방에 들어와 얼마나 울었는지.

엄마는 한참 뒤 들어오셨다.


" 너 지금부터 솔직하게 말해. 왜 거짓말한 거니?"


" 사실 좋아하는 오빠가 생겼는데 선물 사려고"


" 그 오빠가 너 좋아한데?"


" 응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 "


엄마도 화가 약간 풀어지고 나도 울음이 끊겼다.

그리고는 만원을 주시며 뭐든지 솔직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바로


" 엄마 솔직히 허파볶음 사 먹을 용돈도 다 썼어"

"뭐? 그 돈이면 짜장면 몇 그릇을 먹을 텐데 "

" 짜장면은 너무 달어. 근데 허파 볶음은 진짜 맛있어"

" 그만 먹어! 누굴 닮아서 징그런 것만 먹니?"

'⋯?'

엄마가 산 낙지 먹는 걸 봤는데 누굴 닮았다니.


"치과는 가야 해. 30만 원 할 거야 엄마랑 다음 주에 가자"

"웅웅 엄마 미안해 "



그리고 처음 안아주셨고, 대화라는 걸 오래 했다.

엄마가 조금씩 친엄마로 느껴졌다.


아뿔싸! 냉동실에 껌으로 만든 이빨이 생각나서

얼른 부엌에 가서 빨리 버렸다.

절뚝절뚝 거리며 내 방에 들어와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고 뼈저리게 결심했다.


다음날 내 종아리는 무지개 빛 멍이 들어있었다.

종이학은 천 번을 접어야 학이 되지만,

나는 백번을 혼나야 사람 되나 싶었다.


그날 방과 후

마니또였던 친구가 다가왔다.


"어제 그 오빠가 너한테 관심 있냐고 궁금했지?"

"웅 왜? 뭐래? 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지?"


"오빠들이 다음부터 다른 친구 데리고 오래"

" 그... 그래? 어제 짜장 떡볶이 진짜 맛있더라"


애써 창피한 감정을 둘러대고,

엄마가 주신 돈으로

혼자 허파볶음 사 먹으러 갔다.


종이학 접으려고 모았던

껌종이, 야단, 그 마음들도

잘근잘근 씹으며......



아이 루달아
너는 중학교 올라가서도 거짓말을 했다.
사람들은 몰랐겠지.
네가 숨긴 파일은 전부
내 머릿속 클라우드에 자동 백업돼 있단다.


그때 너 좋아하던 그 오빠.

유튜브로 50만 구독자 앞에서 이런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아마 그 오빠는

네가 종이학 접느라 팔 후들거리던 것도

모를 거다.


생각해 보면

그날 엄마한테 안겨 엉엉 울었던 그 순간이

아니… 엄마가 너를 안아준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정서적 안정이 생기니까

입도 더 잘 돌아가더라.


살아보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사람을 울리는 검은 거짓말,

사람을 살리는 하얀 거짓말,


그리고…

무지갯빛으로 띄우는

정체불명 감성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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