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건널 수 없는 강
1986년, 계란 노른자 날씨
체육대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나는 이미 마음만큼은 칼 루이스 수준이었다.
저학년 때는 100m도 잘 뛰었었다.
문제는…
달릴 때마다 상체가 흔들려서 페이스가 망가졌다.
그래도 상장 욕심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야 용돈을 받고 핫도그를 사 먹을 수 있기에.
아차산이든 골목이든
사람 없을 때만 골라 비밀 훈련을 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그림자와 경주하듯 뛰었다.
“하나, 두울, 셋!”
그런데 숨을 고르기도 전에 사방에서
“왈왈왈!”
" 월월월!"
" 워우우울!!"
하 ~동네 개들이 완전 오합지졸이었다.
내 몸에서 핫도그 시그널이 송출됐는지,
골목이 작은 재난 알림 테스트처럼 울렸다.
나는 개들과 서로 비명을 질르기도 하면서,
그렇게 달리기 연습에 목숨을 걸었다.
근데 심각한 걱정거리 하나.
몸이 커지니까 뛰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체육복을 입으면 ⋯ 불룩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상장은 간절하고,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번뜩!
'그래 그거야! 고정시켜 버리자!'
그래서 압박 붕대를 사다가 포대기처럼 꽉 동여맸다.
묶어보니 생각보다 단단해졌다.
약간 삼단 변신 로봇처럼 불편했지만,
그 부분만 작아 보여서 은근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리본으로 마무리해서 묶은 곳이
겉옷 위로 너무 티가 나는 것이었다.
앞을 감추려다 보니 뒤쪽은
탈주한 찹쌀떡처럼 스멀스멀 탈출을 시도했다.
다시 쓰윽 긴 숨을 들이마시고선
얼굴이 터질 것 같은 고행을 감수하며 묶었다.
리본 끈을 고양이 혓바닥만큼만 줄이니까
심히 보기 좋았더라…였다.
가라사대,
‘역시 완벽해~이 상태면 백 프로 실력이 나오겠지.’
다음 날. 전날 연습한 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꽉 조이고 출전했다.
휘슬이 울리자마자 '달려라 하니'처럼 뛰었다.
초반 스피드는 아주 기가 막혔다.
근데 중간쯤 몸이 갑자기
해파리처럼 뭔가 널브러지는 느낌이었다.
' 윽, 절대 안 돼!!'
로봇 갑옷이 내 의지에 항복한 듯,
압박붕대가 덜렁 풀어져버려
뒤에서 질질 끌리고 있었다.
앞줄에 앉아 있던 애들이 죄다 벌떡 일어서서
'도대체 저게 뭐냐' 레이저로 쏘는듯한 눈빛.
난 창피해서 울어야 정상인데…
나도 이해 못 할 웃음 버튼이 눌렸다.
미라 풀리듯 웃으며 뛰니 다리는 꼬이고 기록은 20초.
난장 파티의 내 모습은,
실력도 망치고 체면도 날렸다.
수돗가에서 얼굴 씻으며 수치심까지 벗겨내고 싶은데,
애들 눈치는 또 기막히게 좋아서
“루달아… 괜찮아…?”
하~ 입장 바꿔봐라 내가 괜찮아 보이겠냐 싶었다.
괜히 위로하는 척 내 비밀을 잡았다는
그 표정들이 양말 속이라도 숨고 싶을 만큼 가혹했다.
아… 강은 이미 건너졌다.
나의 콤플렉스를 다 알게 된 거 같아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걱정됐다.
화장실로 돌아가서
압박붕대를 휴지통에 팍! 던져버렸다.
'다신 나하고 만나지 말자, 이 자식아.'
거울 앞에 서니까 이제야
묶여 있던 답답함이 싹 빠지고 맑아 보였다.
그냥 내 얼굴이 그렇게 정들어 보일 수가 없었고,
세상 여유로운 '호호 아줌마' 같았다.
상장 욕심도 그 순간 내려놨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쇠젓가락이 스피커를 뚫는 듯 삐~~ 굉음이 울렸다.
" 아 아 마이크 테스트 ~ 하나 둘 셋 롤롯! 똑똑!
이번에는 던지기 시합입니다!"
내 차례가 와서, 평소에 개뼈다귀 놀이할 때처럼
힘쓰는 그대로
'엣다~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쓱~ 던졌는데…
공이 운동장 담장 끝까지 날아갔다.
말도 안 되게, 팔뚝 안에 있던 힘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거다.
고무공 하나 대충 던졌을 뿐인데,
그다음 주 조회 시간에
던지기 1등으로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받았다.
어쩌면 오빠한테 맞으며 버텼던
그 ‘매집’이 진짜 근육이 됐나 싶었다.
욕심을 비우니까 상장이 채워지는구나.
그때 처음,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걸 느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장과 용돈을 교환하러 집으로 갔다.
엄마에게 상장을 보여줬는데 콧 방귀만 뀌셨다.
엄마는 뻥튀기 만들어야 한다고
봉지에 주섬 주섬 쌀을 담기만 하셨다.
심퉁이 막 올라왔다.
" 엄마! 왜 나는 살도 찌고 가슴까지 불었어!"
" 살은 네가 많이 먹어 서고, 그건... 유전이야"
" 유전? 아니~좋은 걸 물려줘야지 불편한 건 다 줬네!"
" 나도 처녀 때부터 그것 때문에 천으로 묶고 다녔어"
나도 압박붕대로 묶었는데, 생각도 유전 인가 싶었다.
그렇게 붕대사건으로 망신과 진물이 사라질 무렵.
이상하게 ‘잡초’ 노래도 부르기 싫어졌었다.
아이였던 내 목소리가 갑자기 유치해 보였고,
내 마음은 어른언니들이 부르는 노래 쪽으로 기울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쇼팽이니 베토벤이니
늘 같은 곡만 치다 보면 따분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럴 때면 머리 식힐 겸 포켓가요를 펼쳐
한 곡씩 건반으로 맞춰보곤 했다.
그때 처음 본 이름이 ‘한영애’.
제목부터 낯선 ‘건널 수 없는 강’.
‘강은 그냥 건너면 되는 건데… 왜 못 건넌대?’
말뜻은 알겠는데, 마음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요단강도 알고 요강도 아는 나였지만
그래도 리듬만큼은,
내가 아는 세계랑 딱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가사 첫 줄은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이…’
보는 순간 ' 빨간 휴지 줄까 노란 휴지 줄까'가 스쳤다.
이곡은 신문지 끝에 붙은 밥풀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세상 설움 다 겪은 애처럼, 끈적한 노래를 불렀다.
얼굴도 점점 늙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노래는 내 표정의 연식을 당겨버렸다.
그렇게 혼자 익힌 노래를 얘들 앞에서 불렀다.
하지만 '잡초'를 부를 때와 분위기가 딱 갈라졌다.
반만 집중해 주고
나머지 애들은 코딱지 파고, 하품하고, 젠장.
순간, 나 혼자 다른 우주에 있는 느낌이었다.
노래하면서도 그 표정들이 다 보였다.
붕대 사건으로 이미 망신 다 당했으니, 이판사판이었다.
‘그래, 다음엔 흐느적 궁둥이라도 흔들어야지.
내 블루스 좀 맛봐라.’
그렇게 장송곡 같은 노래를 끝내려는데
죽은 척하던 애들이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울트라 공룡들이 트림하는 소리처럼
“붕~~~ 붕~~~ 붕!”
소독차가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들어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만 들리면 아이들은 좀비 눈빛으로 변해서
조건반사로 뛰쳐나갔다.
어른들은 냄새난다며 코부터 막았지만
우린 눈 오는 날 똥 강아지처럼
그 흰 연기 뒤로 홀린 듯이 따라다녔다.
어른언니 흉내 내던 내 마음도
그 순간 같이 튀어 나갔다.
블루스는 무슨,
잡초가 내 진짜 옷인 것 같았다. 끝!
지금은
아이 목소리와 어른 마음 사이를
서서히 건너가는 중이입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은 사실 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가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허우적대던 저를 두고
시간은 계속 흐르는 척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재해석하는 순간,
강은 길로 바뀌어 떠 다녀 보입니다.
시곗바늘인 뱃사공은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침반 되어 깨어나도록
참 자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과 11월 첫날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