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앞뒤 모든 균형이 무너져버린 아빠와 함께 3차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확실한 병명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해야 했다. 아빠는 간단한 x-ray 검사조차 혼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초도 가만히 견뎌내기 어려운 아빠의 몸을 붙잡으러, 난 납앞치마를 입은 채 검사실에 들어가 아빠의 몸을 붙들고 또 붙들었다.
여전히 펴지지 않은 폐를 확인한 의사는, 조직검사를 진행하자고 하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폐는 부위에 따라서 조직검사의 방법이 다르다고 했다. 하필 아빠는 입에 내시경 관을 넣어서 검사를 해야 했다. 일반인에게는 그렇게 강도 높은 검사는 아니었지만, 중증 환자인 아빠에게는 매우 고된 시간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검사가 끝나고 나온 아빠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더 고되고 힘들어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눈빛을 아빠에게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일한 보호자인 내가 아빠의 병명을 알아야 하는 이유로 검사를 진행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시, 나는 6인실 남자 병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제일 입구 쪽에 배치된 아빠의 자리는 아주 조금의 프라이버시도 지킬 수 없는 위치였다.
식사 때면 입으로 새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음식물들, 양치, 노린스로 아빠의 머리를 감기고, 몸을 닦는 모든 것들이 공유된다. 그런데, 커튼으로도 막을 수 없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빠의 기저귀를 가는 시간이다. 무거운 몸을 옆으로 돌리고 닦고 교체하는 꽤 걸리는 시간에 퍼져나가는 그 냄새와, 나의 민망함은 커튼 사이로 전달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리였다. 6명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어쩔 수 없지만, 건너편 아저씨가 야한 동영상을 보는 소리까지 공유되는 건 너무나 불쾌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아빠의 냄새는 귀여운 것 같기도.
우리 부녀가 함께하는 이 시간. 난 아빠의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찍어두었다.
2010년만 해도 이렇게까지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을 때라 엄마의 사진과 영상을 남겨두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찍은 아빠의 사진을 보면 늘 표정이 어둡고 지쳐있었다.
‘아빠, 아프지 않아?’라고 물어보면 ‘아냐, 안 아파’.
우리 아빠는 딸 위해서 아픈데 안 아프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세상 솔직하게 말하는 귀여운 조아빠인데. 매번 내 질문에 아프지 않다고 했다.
“아빠,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
“지금”
“응? 지금? 이렇게 아파서 병원에 있는 지금?”
“우리 딸내미랑 같이 있잖아.”
“..........”
해외 생활로 8년의 떨어져 있던 시간이, 아니 내가 아빠의 품을 떠나 분가한 그 시간부터 매일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던 그의 마음이 처음으로 내게 ‘부모의 사랑’으로 다가왔다.
아빠는 늘 철이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기에, 웃기지만, 난 내가 아빠를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왔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나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정말 철이 없던 건 아빠가 아닌 나 아니었을까.
몇일 후, 드디어 여러 검사 결과가 나왔다.
가슴 철렁 내려앉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빠는 폐암 말기, 척추에도 전이가 되었고, 뇌까지 전이가 되어 큰 암세포가 2개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몸에 통증이 없던 게 아니라, 뇌의 감각이 없어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하나뿐인 아빠의 건강이 이렇게 될 정도로 챙기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에 깊이 함몰되지 않으려 했고, 이기적이지만 나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로 선택했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난, 평소 아빠가 나를 늘 ‘든든하고 착하고 예쁜 딸’로 생각했던 것을 하필 그때 떠올렸다. 나름대로 아빠에게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시키며, 먼저 내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였다. 아. 대체 사람은 어디까지 이렇게 이기적인걸까.
온몸에 퍼진 암세포를 가진 아빠는 파킨슨으로 인해 더 이상의 치료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눈앞에서 아빠의 상태를 보면서도, 1% 가능성을 위해 항암치료를 권유하는 의사가 이해되지 않았고, 야속했다.
그렇게, 아빠는 3차 병원에서도 거의 쫓겨나다시피 요양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같은 동네라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 달 넘게 24시간 꼬박 붙어있던 아빠와의 주 1회 면회는, 심장의 한켠이 뻥 뚫린 것만 같은 허전함 가득한 것이었다.
오며 가며 요양병원을 지나갈 때마다, 안에 누워있는 아빠를 떠올리며 보고 싶어 울고, 마지막을 생각하며 또 울었다.
그래도 조금씩,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