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승예

겨울이 시작되었다.
달력을 넘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집 안의 공기가 먼저 변했기 때문이다. 난방을 켜지 않았는데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코끝이 얼얼했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도 어느덧 닷새째였다.

유정은 불을 끈 채 엄마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스위치를 켜면 모든 것이 확정되어 버릴 것 같아, 일부러 어둠을 그대로 두었다. 눈이 익어질수록 방 안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벽에 기대어 세워 둔 낡은 가방, 한쪽으로 기울어진 협탁, 그리고 그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은 정적.
이 방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도 급하게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누군가가 곧 돌아올 것처럼, 기이할 만큼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정은 손톱을 깨물다 말고, 피 맛이 나자 그제야 손을 내렸다.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통증이 오기 전에 감각이 먼저 닳아버린 것 같았다.

창문 너머 아파트 복도에는 퇴근길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스쳤다. 그림자는 일정한 속도로 벽을 따라 미끄러지다, 계단 모서리에서 갑자기 끊겼다.

유정은 그 단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사람이 사라지는 방식이 저렇다면,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바 사장의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정아”로 시작하던 메시지들이,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은숙 이모가 엄마의 실종 이야기를 전했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사장은 이미 유정을 대체할 사람을 구해 이 모든 변수를 정리했을지도 몰랐다.
유정은 그 어느 쪽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정말로 밀려났다는 사실이 명확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다툰 뒤 연락이 끊겼던 이모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한참 뒤, 마치 이미 수십 번 되뇌었던 문장처럼 낮고 단정하게 말했다.
“그래… 그럴 때가 됐지.”

그 말은 위로도, 놀람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결론처럼 들렸다.
유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일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겐 이미 시간 문제였다는 사실을.


민선이 사라진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유정은 베개 아래에서 유서를 발견했다.
손에 쥐었을 때 종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망설임 없이 접고, 다시 펴고, 다시 접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종이 위에는 민선이 생을 마감할 장소가 적혀 있었다. 과장도, 변명도 없는 문장이었다. 마치 주소 하나를 남기듯, 너무도 침착한 필체였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아무 말 없이 사라져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종이를 남겼다는 사실이 유정을 불편하게 했다.
끝까지 자신을 통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될 가능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혹은 정말로, 물 위에 떠 있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누군가가 의미 있는 죽음으로 기억해 주길 바랐던 걸까.

유정은 유서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이 모든 해석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서 고결함 같은 것은 쉽게 증발했다.

삶을 포기하는 선택에 무게를 실어주기엔, 삶 그 자체가 이미 너무 오래 굶주려 있었다.


유정은 쇠젓가락으로 유서를 집어 들었다. 가스레인지 불꽃 위로 종이를 가져가자, 글자들이 먼저 일그러지며 녹아내렸다. 주황빛을 삼킨 종이는 곧 검게 말려들었고, 가느다란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그 냄새는 종이가 타는 냄새라기보다는, 무언가 오래된 기억이 태워질 때 나는 냄새 같았다.

남은 재를 손바닥에 모아 베란다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손등을 스쳤고, 유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폈다.
잿가루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바람에 흩어졌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애써 붙잡아왔다는 사실만, 그제야 또렷해졌다.

유정은 문득, 그토록 원하던 죽음에 다다른 엄마에게 축하라도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결국 죽을 용기조차 없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일 뿐이었다.
죽느니 못한 삶을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엄마의 선택을 두고 혀를 차는 모습을 떠올리자, 유정의 속에서 느리게 분노가 끓어올랐다.

엄마의 선택을 논할 자격은, 이미 그 선택의 끝까지 가 본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닷새가 지났다면, 지금쯤 엄마의 몸은 물속에서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살은 물을 머금어 무겁게 늘어지고, 장기에는 가스가 차올라 더 이상 가라앉지 못한 채 수면 가까이를 떠돌고 있을 시점이었다.

유정은 그 얼굴을 상상했다.
물에 불어 창백해진 얼굴로, 눈은 뜨고 있을지, 감겨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정말 오필리아처럼, 어딘가의 물가를 따라 천천히 떠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유정의 입술 끝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슬퍼서도, 미쳐서도 아닌 웃음이었다.
그저 더 이상 놀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의 얼굴에 남는 마지막 표정 같았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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