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린

by 김승예

버스에서 막 내린 현의 눈에, 멀리서 익숙한 남색 더플코트를 입은 용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삼촌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받았다는 그 코트는, 보통 남자라면 무릎을 살짝 넘기는 기장일 테지만 작은 체구의 용빈에게는 발목 언저리까지 내려와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두툼한 코트 자락이 바람에 느릿하게 흔들릴 때마다, 현은 그 모습이 어쩐지 현실감 없이 멀게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를 스치며 걸어오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코트의 끝자락에 매달렸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온 탓인지, 현의 몸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 동시에 가슴 한켠은 텅 빈 듯 가벼웠고, 그 가벼움이 오히려 불안으로 번졌다. 유정과 함께 걷던 거리라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오늘은 그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없었다. 괜히 웃음기 어린 장난이라도 치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들켜버릴 것 같았다. 현은 용빈을 놀라게 할 생각에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늦췄다.


마침 용빈은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등으로 몇 번이고 소매를 쓸어내리며, 세상과 잠시 단절된 사람처럼 보였다. 현은 그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가 숨을 고른 뒤,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용빈!”

그러나 상상했던 놀람이나 과장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 용빈은 뒤늦게 고개만 살짝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어, 왔냐?”

맥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현은 잠깐 멋쩍게 웃었지만, 곧 표정을 거두었다. 기대했던 소소한 웃음조차 허공에 흩어지자, 마음속 어딘가가 더 조용해졌다. 유정이었다면 분명 뒤돌아보며 웃었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고, 그 생각은 현의 가슴을 묘하게 조였다.


용빈이 현을 데리고 간 곳은, 새해 첫날이 지나고도 여전히 열기로 들끓는 시내의 술집 촌이었다. 간판마다 형광빛이 번쩍였고, 길바닥에는 녹다 만 눈이 검은 물기를 남긴 채 질척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호프집 몇 번 가 본 게 전부였던 현에게 이곳은 지나치게 빠르고 요란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는 괜스레 말없이 용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용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촘촘히 얽혀 있었다. 붉은 글씨가 깜빡이며 술값을 외치고, 파란 조명이 젖은 도로 위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회식 후 삼삼오오 모인 회사원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웃고 있었고, 현 또래로 보이는 청춘들은 길가에 모여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공중에서 느릿하게 퍼지고, 꼬치구이와 튀김 냄새가 찬 겨울 공기 속에 섞여 묘하게 따뜻한 온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골목마다 울려 퍼졌지만, 그 소리는 현에게만 유독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용빈은 현을 데리고 술집 거리를 세 바퀴나 돌았다. 그 눈은 사람들 틈을 헤치며 무언가를 고르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창문 너머의 분위기를 살피고, 간판 아래 메뉴판까지 빠짐없이 확인했다. 현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유정과 함께였다면, 이런 거리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감각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결국, 가장 북적이는 가게 앞에서 용빈이 멈춰 섰다. 출입문 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노란 불빛과 함께 음악 소리가 골목까지 흘러나왔다. 유리문에는 안쪽의 열기로 김이 서려 있었고, 누군가 문을 열 때마다 웃음소리와 함께 뜨거운 공기가 거리로 밀려 나왔다. 용빈은 문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며 안쪽을 살폈고, 현은 그 뒤에 서서 한 발짝 물러난 채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세계는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은 그 문턱 앞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들어가면, 잠시라도 유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또렷하게, 더 선명하게 떠오를까. 그런 생각이 스치는 사이, 용빈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현은 잠깐 숨을 고른 뒤, 아무 말 없이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술기운이 서서히 몸을 덥히고, 시계 바늘이 열 시를 훌쩍 넘기자 술집 안의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합쳐졌고, 낯선 이들이 잔을 부딪치며 금세 오래된 친구처럼 웃고 떠들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용빈은 한동안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잠시 뒤 그는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현.”
그는 앉아 있는 현을 내려다보며 유난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애들이랑 신나게 술 마시는 쟤네보다 우리가 뭐가 못났냐. 우리도 합석하자.”

현은 안주로 나온 어묵탕에서 김이 오르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잠깐 눈을 찡그리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수로?”

“그야 당연히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면서 말 거는 거지.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다가오는데, 여자애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우리한테 먼저 오겠냐.”
용빈은 팔짱을 낀 채 안주만 뒤적이고 있는 현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너는 진짜, 이런 데까지 와서 시커먼 남자 둘이서만 술을 홀짝이고 싶냐?”

현은 길게 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주변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묘하게 멀게 느껴졌다.
“합석은 무슨 합석이야. 우리끼리 마셔도 재미만 좋은데. 뭐하러 귀찮게 그래. 그냥 앉아.”

용빈은 마지못해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그의 시선은 좀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낯선 남녀들이 잔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테이블 쪽으로 눈이 자꾸만 흘러갔다. 그 눈빛에는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는 현의 말을 중간에 끊고 다시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는 못 참겠다.”
잔을 탁 내려놓으며 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야, 사내놈 둘이서 술만 마신다고 뭐가 재밌냐. 현아, 내가 여자 데려올 테니까 넌 그냥 머릿수만 맞추고 있어. 술값은 내가 다 낼게.”

현은 술잔을 들고 있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용빈의 등을 보며, 오늘 밤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겠다는 걸 직감했다.


용빈은 사람들로 가득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능청스러운 웃음을 던지고, 때로는 손짓을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결과는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사람들, 애써 웃으며 거절하는 사람들, 애초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한참 만에 돌아온 용빈의 얼굴은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었다.
“하... 나는 어차피 안 될 새끼인가 봐... 키가 작아서 그런가?”
자조 섞인 말 한마디를 던진 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잔이 비워질수록 어깨가 조금씩 더 처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장에 다시 나서는 장수처럼 잔을 내려놓았다. 눈빛이 다시 단단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현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갓 젖 뗀 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부모처럼, 자꾸만 시선이 용빈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혹시 또 거절당하지 않을까, 괜히 자신까지 민망해지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번번이 퇴짜를 맞던 용빈이 창가 쪽 테이블 앞에 멈춰 서더니,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나누는지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몸짓이 이전과는 달랐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작게 흔들며 설명하듯 말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자신들과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현은 그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늘 밤 목표가 뚜렷해 보이는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잔을 들어 올리고, 취기에 부드러워진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말없이 보내는 조용한 응원 같았다.


잠시 뒤, 용빈의 뒤를 따라 여자들이 한 명씩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의자를 끌어당기며 옆자리에 앉자, 은은한 향수 냄새가 테이블 위로 번졌다.
“안녕하세요.”
수줍게 건네는 인사와 함께, 그들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두 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자리 함께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일단 술 한 잔 받으시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들뜬 얼굴로 건배를 제안한 사람은 용빈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잔만 만지작거리던 현의 걱정이 무색하게, 용빈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질문을 던지고, 농담을 보태고, 상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말끝마다 웃음이 따라붙었고, 어색하게 굳어 있던 공기가 조금씩 풀렸다.

현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치원 때부터 붙어 다니던 친구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낯선 조명 아래에서 용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잔이 몇 번이나 오가며 웃음소리가 높아질수록, 용빈의 시선은 점점 자신 옆에 앉은 여자에게만 머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대화가 잘 풀려서겠거니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두 사람만의 작은 세계가 만들어진 듯했다. 그 안으로는 아무도 쉽게 끼어들 수 없어 보였다.

현은 문득 자신이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밀려나 있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들리던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멀어졌다. 손에 들린 잔만 괜히 몇 번이나 돌리다가, 결국 조용히 술을 홀짝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용빈 씨 친구분은 이름이 뭐예요?”

현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봤다. 처음 테이블로 올 때는 멀리서 스쳐 보았을 뿐, 막상 옆에 앉은 뒤로는 괜히 긴장이 되어 시선조차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또렷했다. 옅게 올린 화장 위로 콧잔등에 잔잔하게 흩어진 주근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점들이 오히려 큰 눈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아직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오동통한 양 볼은 어딘지 모르게 포근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다.

현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 맑아서였는지, 자연스럽게 시선을 맞춘 채 대답했다.
“저는 김현이에요.”

“저는 윤나린이에요.”
나린은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몇 살이에요?”
“이제 스무 살 됐어요.”
“동갑이네요.”

그 말을 듣자 나린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깨가 눈에 띄게 편해졌고, 눈웃음이 자연스럽게 번졌다. 어쩌면 그동안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의 거칠거나 부담스러운 관심에 조금 지쳐 있었는지도 몰랐다. 또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계가 스르륵 풀리는 기색이었다.

“말 놓을까요?”
나린이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며 물었다.

“좋아요.”
현도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어색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잔이 가볍게 부딪치자, 방금까지 혼자 남겨진 듯하던 마음도 조금씩 풀어졌다.

“너는... 대학 어디 붙었어?”
나린은 고개를 숙인 채 잔을 조심스럽게 채우고 있는 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서울에. 그래서 다음 주에 자취방 알아보러 가.”
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잔을 채우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아... 그럼 여기에 안 있겠구나...”
나린의 얼굴에 아주 잠깐, 그러나 분명히 스쳐 지나가는 그늘이 어렸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현은 그 변화를 놓치지 못했다. 술을 몇 모금 더 들이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나린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같이 마시자.”

나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부딪쳤다.
“짠.”
맑게 울린 소리가 잠깐 두 사람 사이를 채웠지만, 그 뒤로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는 웃지도, 말을 이어가지도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자 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나린이 다시 잔을 들려 하자 손등으로 살짝 막으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그래서... 나린이 너는 무슨 과야?”

나린은 잠깐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손가락으로 잔의 물기를 괜히 문지르다가, 한숨처럼 짧게 대답했다.
“간호학과. 상실대 붙었어.”


오전 두 시 무렵, 술집 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후끈하던 공기가 뚝 끊겼다. 뜨겁게 달궈진 피부 위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얇은 칼날처럼 스며들었다. 취기가 한 겹 걷히는 듯 머리가 맑아졌고, 동시에 몸이 작게 떨렸다. 네 사람의 입김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하얗게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흩어졌다.

그 사이 용빈은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던 현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고 있었다. 술집 안에서부터 이어진 웃음이 여전히 그의 얼굴에 남아 있었고, 현지는 그런 용빈의 몸짓에 익숙한 듯 고개를 살짝 기대고 있었다. 앞서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린과 현은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따랐다. 술집 안에서 잠깐 가까워진 듯했던 두 사람 사이도,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다시 처음의 거리로 되돌아간 듯했다. 말은커녕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두 사람은 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앞서가는 연인의 등을 따라 걸었다.

현은 용빈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환하게 풀린 표정이 낯설었다. 그 웃음이 괜히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알고 있던 친구와는 조금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용빈이 현지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더니 팔을 슬쩍 풀고 성큼성큼 뒤로 걸어왔다. 볼이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은 들뜬 빛으로 반짝였다.

“야, 네 옆에 앉았던 여자애는 어땠냐? 잘 될 것 같애?”
용빈은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나린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잘되긴 뭐가 잘돼.”
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한쪽 입꼬리가 애매하게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왔다.

“나는 현지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얼굴도 예쁜데, 말도 잘 통하고, 착하기까지 해. 잘만 하면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아. 미안한데, 이 친구를 위해서 집은 너 혼자 가라. 아니면 네 옆에 앉아 있던 애랑 같이 가든가.”

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용빈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친구가,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용빈은 그런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 채,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을 한 번 툭 치고는 다시 현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골목으로 스며들었고,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건 나린과 현, 단둘이었다.


술기운 위로 피로가 겹겹이 올라왔다. 현은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떠나보낸 자리에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없이 서 있는 나린을 두고 “잘 가” 한마디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아까 술 많이 마셨잖아. 집이 어디야? 바래다줄게.”
말은 담담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책임감이 섞여 있었다.

늦은 밤의 공기는 축축했다. 낮에 얼었다 녹은 땅에서 풀 냄새가 은근히 올라왔다. 신호등은 점멸 모드로 깜빡이며 텅 빈 교차로를 지키고 있었다. 한두 대 남은 택시가 느릿하게 두 사람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기사들이 창문 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졌지만, 현은 손을 가볍게 저어 택시를 보냈다. 왠지 모르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시작됐다. 가로수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 어둠이 더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불빛 아래에서는 내외라도 하듯 멀찍이 떨어져 걷던 나린이, 어둠 속에 들어서자 슬며시 현에게 가까이 붙어 걸었다. 팔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술집에서 옆에 앉았을 때보다도 훨씬 가까웠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걸음이 잠깐 흐트러졌다. 하지만 나린이 술기운에 자꾸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엇나갈 때마다 몸이 흔들렸고, 현은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맞췄다. 넘어질 것 같으면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거리. 차라리 이게 낫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걷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손등 위로 차갑고 조심스러운 감촉이 스며들었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 나린의 손이었다.

현은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어둠 속에서는 표정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만 가까이서 느껴졌다. 심장이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현의 굳은 기색을 느꼈는지, 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추워서... 내 옷엔 주머니가 없거든. 네 주머니 빌려도 되지?”

“어? 어...”
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나린이 손을 넣은 쪽 어깨가 살짝 아래로 기울었다. 근육이 어색하게 뭉쳤고,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졌다. 심장은 제멋대로 크게 뛰었다.

집 근처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느 순간 나린이 천천히 손을 빼냈다. 주머니 안이 갑자기 텅 빈 것처럼 허전해졌다. 그리고 분명 없다고 했던 옷의 어딘가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불빛이 어둠 속에서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나린은 잠깐 망설이다가, 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번호 좀 줄래?”



현은 발소리를 죽인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삐걱거릴 때마다 누군가 깨어날까 괜히 숨을 죽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코트와 양말을 대충 벗어 방바닥에 던져 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매트리스가 둔하게 꺼지며 하루의 피로가 등 뒤로 스며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던 손끝에서 낯선 잔향이 퍼졌다.
나린의 향이었다.
상큼한 과일 냄새가 추위에 시큰해진 코끝을 간질였다. 술집의 소음, 어둠 속에서 스치던 손의 감촉, 주머니 속에 들어왔던 체온이 뒤늦게 떠올랐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졸음이, 마치 누군가 문을 열어젖힌 것처럼 서서히 걷혔다.

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한 번 더 손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에 얼굴을 씻는 동안 거울 속 자신의 눈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돌아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휴대전화를 들어 알람을 맞추려 화면을 켜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새벽 네 시에 가까운 시간.
그 아래, 읽지 않은 메시지 한 통이 떠 있었다.

‘잘 들어갔어? 네가 서울 가는 건 알지만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싶어서 번호 물어본 거였어.’

현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어둠 속에서 혼자 읽는 문자치고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사이, 가슴 어딘가가 서서히 식어갔다. 방금까지 선명했던 향기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자를 길게 눌러 삭제했다.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취하면 네 생각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기는커녕, 보고 싶은 마음만 더 커지냐…’

잠은 오지 않았다.
방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불규칙하게 귓속을 긁었다. 현은 결국 몸을 뒤척이다가 머리맡에 두었던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화면이 켜지며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퍼졌다.

손끝은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눌러갔다.
받는 사람 칸에 오래된 주소를 입력하고, 제목을 적었다.


제목: 유정아. 나 현이야.

유정아, 잘 지내니?
내일이면 나도 졸업이야. 11시에 시작하거든.
이 메일을 쓰는 건, 네가 와줬으면 해서야.

혹시 사람이 많은 게 부담스럽다면, 내일이 아니어도 돼.
언제든 괜찮아.
네가 편한 날, 편한 장소에서 그냥, 다시 한번 얼굴을 봤으면 해.

그리고 나 다음 주면 서울 올라가.
그 전에, 마지막이라도 좋으니까, 널 보고 싶어.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만약 나를 만나기 싫다면, 그것도 괜찮아.
그냥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만 알려줘.

쓰고 보니, 주절주절 내 얘기만 늘어놨네.
그치만 유정아, 난 네가 정말 걱정돼.
문자도 안 받고,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번호가 바뀌기라도 한 거야?

-현


마지막 줄을 찍고 나서도 한참 동안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보내기 버튼이 화면 한가운데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과일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현의 머릿속에는 오래된 이름 하나만이 무겁게 맴돌았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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