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해.
미안해.
몰라줘서 미안해.
고마워.
작은 것에도 고마워.
대단해.
정말 정말 대단해.
행복해.
내가 나임에 행복해.
괜찮아.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
추신,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흔히 ‘알쓸’ 시리즈입니다. 요즈음 하루를 마감할 때면 포근한 이불을 덮고, 이 프로그램을 틀어놓곤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여행을 간 박사님들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지식을 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언젠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나도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꿈도 고개를 내밉니다. 가장 최근 시리즈에서는 지중해에 크루즈를 타고 유럽의 도시들을 도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항구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마르세유에서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바티칸 변호사로도 유명한 한동일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언장을 쓰지 말고, 내 삶에 대해서 연애편지를 써보자.’ 끝없는 불안 속에 우리는 어느새 유언장을 품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를 떠올리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불안보다는 설렘. 그 간질간질하고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드는 그 편지. 아니지. ‘불안보다’는 이라는 말보다 ‘불안 속에서도’로 바꾸겠습니다. 함께이기에 버틸 수 있는 그 포근한 편지. 그런 편지를 품고 사는 삶을 살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어떤 사랑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분들은 유독이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한 농담을 봤습니다. 미국에 유학한 한 아이가 어머니께 그랬답니다. 다른 친구들은 ‘B’를 받으면 용돈을 받는데, 자기는 왜 ‘B’ 학점을 받으면 왜 맞느냐는 거였죠. 분명 ‘B’의 의미는 ‘Good’임에도, 우리 한국 엄마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좋은 효과도 있을 겁니다. 이런 모습들이 근면·성실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만들었고, 해외 어디를 가든 멋지게 자리를 잡는 원동력이었을 테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조금 과도해지면서 우리나라의 행복지수, 삶을 포기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늘 무언가 쫓기듯 일, 연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뒤처지면 끝이라는 그 불안 속에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멈춰도 괜찮아.’, ‘쉬어도 괜찮아.’라는 말을 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제 경험상 남이 아닌 스스로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어야 비로소 진짜로 쉼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나’라는 아이가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요. ‘뒤처지면 끝이다.’, ‘성공만이, 돈만이 인생의 전부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편지를 읽어줄 거 같습니다. 수도 없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 세상의 너 혼자만 버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나와 내 마음이 한 팀을 이루어 같이 가는 것이라고. 남들에게 그토록 듣기를 바라던 말은 스스로에게 먼저 해주었을 때, 마음에 작은 공간들이 나고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다른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이제야 더듬더듬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또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라는 말은 내 모든 것이 옳다는 것도, 내 입에 달콤한 것만 먹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가 귀하기 때문에 관리를 하는 것이고, 스스로가 귀하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추신을 쓰면서, 스스로를 한번 포옹하듯 안아주고, 손으로 팔을 쓸어주었습니다. 이런 셀프 허그(Self-Hug)는 우리 건강에 아주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그런 효과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사랑해 주겠다는데 말이죠.
‘스스로에게 쓴 연애편지를 읽어주세요. 당신을 조금은 더 아껴주세요.’
- 세상 가장 귀한 당신의 손에 강유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