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주부남의 주부 9단 정의

빵꾸난 고무장갑보다 중요한 것


안녕하세요

초짜주부남입니다


주부 성장기라고 책 제목을 적곤

다른 이야기가 조금 길었습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 초짜 주부남 -



< 초짜 주부남의 일과표, 숨 쉴 틈이 없다>

< 고무장갑에 구멍이 뚫렸을 때의 그 상실감 >

< 주부 9단의 정의 >



< 초짜 주부남의 일과표, 숨 쉴 틈이 없다>


내가 애초에 여기 스위스에 온

그중에 가장 첫 번째 이유로는

아내(이하 슈퍼보스)가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니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시세끼, 집안 청소, 빨래, 장보기,

겨울용 타이어 교체, 등등

집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보직명 ‘주부’


주부는 어떻게 왜 이렇게 바쁜지,

진짜 안 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대략적인 일상.

07:30 기상.

08:10 슈퍼 보스 출근.

아침용 과일, 샌드위치 등 준비.

08:30 5km 정도 뜀박질.

09:30~10:00 씻고 숨 좀 고름.

이때부터 1시간 자유 시간.

11:00 요리 시작

12:30~13:30 점심시간

~17:00 설거지, 장 보기, 청소, 저녁 준비 등등


여기 스위스는 물가가 워낙 비싸서

회사 동료들끼리도 점심을 같이 안 하는 분위기이다.

대부분 혼자 먹거나, 회의 차 오찬

혹은 각자 집에서 먹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경우가 있으나,

나는 우리 슈퍼보스가 찬밥 먹기를 윈하지 않는다.

화, 목(영어학원 다니는 중)을 제외한

월, 수, 금은 점심에 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12:40분쯤 먹을 수 있는

따듯한 밥을 해야 한다.

이제야 한국서 보낸 짐이 도착했지만,

그전 3개월 간은 압력밥솥으로 밥을 했다.

웬놈에 물조절과 불조절이 이렇게 어려울까

같은 시간과 물량 그리고 불의 세기로

실험을 해봤으나 빈번히 오차가 있다.

그리고 고무 바킹이 찢어졌는지

압력이 차오르지 않는다.

모양은 압력밥솥이지만 실제론 냄비밥이었다.


그 밥을 미리 하면 딱딱해지니

정확한 시간에 짠! 하고 먹이고 싶다.

그리고 되도록 국이 있어야 목이 안 막히니까,

또한 점심 이후에 회의가 있다면

아무리 양치를 잘하더라도

마늘 냄새가 날 수 있기 때문에

그날그날 메뉴를 잘 선정해야 한다.


따듯한 밥과 국,

그리고 메인 요리 하나를 하려면

적어도 11시에는 준비해야 한다.


함께 밥을 먹고 다시 슈퍼보스는 전장으로 복귀.

난 이제 설거지를 해야겠지?

근데 그전에 물도 좀 마시고 쉬자.

하면 30분이 어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리고 빠르게 정리하면 14:15.

장도 봐야 하는데… ~ 16:00

빨래를 해야겠다, 아 다 됐다 널자. 17:00


슈퍼보스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집 도착 1시간 전이다.

저녁밥을 해야 하는구나.


점심에는 소화가 잘 되게 맥였으니까

저녁에는 좀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고 싶다.

다시 전쟁 같이 유튜브 레시피를 찾아본다.


이렇게 간략적으로 봐도

도대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돌아서면 밥하고 정리하고 빨래하고,

잠깐 넋 놓고 있으면 홀라당 시간이 지나서

정말 알차게 써야 한다.


짐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엔

빗자루로 집안 곳곳을 청소해야만 했다.

청소기에 익숙한 현대인이

빗자루로 온 집안을 쓸어 담을때엔

여간 힘이 부치지 않을 수 없다.

베란다에는 또 왜 그렇게 낙엽이 금방 쌓이는지.


그렇게 슈퍼보스가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나는 녹초가 된다.

뭐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어쩜 이리 고되는가.


사실 나는 출근을 안 하면 시간이 있을 테니

시간을 유용하게 쓸 줄 알았다.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 보다 더 타이트하게,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정신 똑바로 차려서 살아야 하는 게 주부였다.


그리고 만약 집안일이 빵구가 난다면

10번 잘해도 1번 잘못하면

표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주부는 너무 바쁘다.

내가 초짜 주부라서 그럴까

눈에 보이는데 안 할 수가 없다

돌아서면 밥 하고, 돌아보면 뭔가 떨어져 있다

정리는 해도 해도 정돈이 되지 않는다

정돈을 해도 다시 보면 맘에 안 들 때가 있다


이런 내가 과연 주부 9단이 될 수 있을까?



< 고무장갑에 구멍이 뚫렸을 때의 그 상실감 >


나는 설거지를 집안일 중에서 그나마 좋아한다

여기에서는 파스타를 편하게 잘해 먹곤 하는데,

올리브유 기름기를 닦아낼 때

뜨거운 물로 설거지를 하면

‘뽀득뽀득’ 닦이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한국에서 보낸 짐이 3개월이

지났음에도 도착을 안 했다.

그래서 몇 개 산 그릇을

특별히 소중하게 쓰고 있었다.

(라면 그릇 사이즈 정도 싼 걸 찾아도 2만원 이상.)

그래서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든다


또 뜨거운 물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야속하게

왜 자꾸 오른쪽만 구멍이 나는지,

작은 구멍이 날 때

그럴 때 표현하기 싫을 정도로 정말 속상하다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내 맘도 모르고

어떻게 특히 오른쪽에만 구멍이 나는가.

항상 왼쪽은 멀쩡하다.

그렇다고 왼쪽을 버릴 순 없어서

베란다에 놓은

왼쪽 고무장갑만 벌써 3개째다.


이렇게 오른쪽 고무장갑에 구멍이 날 때

초짜 주부인 나는,

내 맘 같지 않은 현실에

이따금 화가 날 때도 있다


“아 또 오른쪽이야 진짜 짜증 난다!!!! 하”


그런 때가 혼자 있는 집안에서

말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설거지를 하다 보면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곤 했는데,

여기서 구멍이 났을 때엔

비교할 수 없이 상실감이 크다


참 별일도 아닌 일에 마음까지 상할 일이야?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왜 고무장갑 따위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거냐”

라는 화의 본질이다


그렇게 고무장갑에 구멍이 난 날에는

잠들기 전 오늘 난 뭐 했지?라는 생각을 할 때

내 맘 같지 않은 일들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출근 할래?

집안일 할래?


나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나에게 대답한다


둘 다 똑같다

결이 다를 뿐



< 주부 9단의 정의 >


주부를 안 해본 사람들은

“아 진짜 내가 주부면 좋겠다”라고들 한다.

맞다

한편으로는 확실히 좋은 건 있다


누군가와 불편한 조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떤 일정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것 등등


익히 경험했던 힘듦을 알기에

그 누구보다 이해한다

하지만

어느 한편 주부로써의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다


그건 바로

‘주부는 모든 걸 혼자서 잘해야 한다’

라는 특징적인 특징.

특히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그리고 말 한마디 없어도

잘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스위스이다.

아는 사람이 없다.

슈퍼보스가 출근하고 난 뒤,

나는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고, 상대도 없다


아무 말 없이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고,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


가끔은 허탈할 때도 있다

난 오늘 뭐 했지?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집안일을 하다 보면 말할 필요 없고,

유튜브 볼 것도, 휴대폰 붙잡고 있을 시간도

금방 금방 지나간다


TV를 켜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란서 말만 나오고

집안일을 해야 하기에 적적하니

유튜브에 노래만 켜놓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검색어는 점점 없어지고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항상 유사하고

김동률, 브라운 아이드 소울에 갇혀 있다

(점점 검색어의 폭이 줄어들고 있다)


바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고

거기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아 그런 게 있구나?

하다 보면 새롭게 알아가는 게 있다

그런데 주부는? 그런 게 없다.


그리고 내가 진정 알아야 하는 것은

이놈에 정치가 어쨌건,

경주에 정상회의가 있었건,

그 드라마가 재밌더라?

이런 것보다

슈퍼보스에게 맛있는 밥을 해주기 위해

스위스에서 간장이 없을 때

간장 불백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주부는 이렇게 정신없이 뭔가를 하다 보면

자신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에도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나는

주부와 직장인 모두 인간적으로 단단해지지만

어느 곳이 단단해지느냐의 결이 다르다

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에서 견디는 직장인은

외적으로 단단해진다

음 그러니까 만약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나, 또는 우리가 피해가 없도록

미리 겹겹이 방어벽을 쌓는다

만약에 안될 경우를 생각해

A안, B안 C안, 또 다른 차선책 등

여러 가지 방향성을 염두하고

두터운 성벽을 쌓아간다

그래서 그 외피는 누구보다 강하다

그게 직장인의 삶이려나 싶다


그러다, 퇴근 한 직장인은

퇴근길에서 무거운 외피를 벗어던지고

집에 도착하면 거북이 등딱지 벗은 듯

뽀얗고 연하디 연한 속살로 소파에 널브러져 진다


그 반면 주부는 외적으로는 연하디 연하다

사회에서 인정해 주고,

발급해 주는 두터운 외피가 없다.

대출도 안되고 연소득을 적을 수 없다.

직업란에 그 흔한 ‘직장인’ 이라고도 적을 수 없는

소속 단체가 없는 ‘주부’라고 적어야 한다

혹은 ‘무직’


그래서 주부는 자기 자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외로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누군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밖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슈퍼보스를

집에서 따뜻하고 가장 편하게 쉴 수 있게 하려면,

주부, 나 자신이 포근해야 한다.


그렇게 혼자만의 내면의 고됨을 이겨내다 보면

바깥양반의 뽀얀 속살을 편히 쉬게 해주는

포근한 집이 된다.


설령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이 나더라도,

이는 다른 종류의 힘듦이기에

바깥 양반을 더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집안 일 하는 사람이 무슨 스트레스가 있어?

직접 해보시라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게임을 하거나 여가시간을 보내기만 한다면

전혀 문제없겠지.

하지만 주부는 집안 ‘일’을 한다

표가 안 나지만, 표가 잘 나는


그렇다면 어떻게 초짜 주부에서

주부 9단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집안일을 잘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마음이 단단한 집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반이 되는 콘크리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주부 9단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 슈퍼보스가

밖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서

짜증이건 스트레스건 여러 충격을 받았을 때,

흔들리지 않게 집에서는 아주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게 그 지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주부 9단의 본질이었다


난 지금은 조금 부족한 초짜 주부.

한국에서는 파, 마늘, 양파 값을 몰랐었다.

이제는 슈퍼보스보다 잘 안다


점점 슈퍼보스가 밖에 일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더 잘 아는

나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렇게 점점 영토확장을 하며

설령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더라도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 주부 9단으로

거듭날 수 있게 나가야겠다


그렇게 나는 이제 주부가 되어보니

옷을 사도 입고 갈 곳이 없다

특정 옷에만 손이 간다


그리고 잘 안 입어 버릇하다 보니

손이 가는 츄리닝에만 손이 간다

여러 옷들을 보고선

“아 내가 이걸 예전에 어떻게 입고 다녔지?”

“어디에 입고 다녔더라 “

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엔 옷을 참 좋아했는데

나도 모르게 변해버렸다

(변한 것일까, 적응한 걸까)


얼마 전 면세점에서 슈퍼보스가


“이런 거 없잖아 잘 어울리네 하나 사”


그 옷은 바버의 한 자켓.

나에겐 너무 비싸다

그리고 어디 입고 갈 곳이 없다

그런데 사실 예전부터 너무 갖고 싶어 했던

모델명도 이미 알고 있었던 그 자켓.


몇 번을 입었다, 벗었다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이 가격에 이게 정녕 나에게 필요할까? 를

폭풍 속에 고민하며 있을 때


“그냥 좀 사 좀”

“안 입을 거야? 맘에 안들어?“

“없잖아 좀 사”


그렇게 그 옷을 샀을 때

미안하면서 고맙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 맘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입을 것 같고

구매한 순간도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예전에 주부인 엄마가 쇼핑할 때 이러셨었다

옷 하나 사실 때 엄청난 심사숙고를 하셨다

몇 번을 입어보시고 다른 곳도 가보자

그러곤 안 사고 온 날이 한두날이 아니다

근데 이제는 이해된다 이제서야..


이렇게 외적으로의 외피인 옷보다

이젠 내면이 더 중요해져 가는,

나는 이제 점점 주부가 잘 되고 있는 것일까?



전국에 계신 주부 9단님들에게,

이제서야 그 대단함을 조금 느낍니다

작게나마 멀리서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 슈퍼보스에게는

이런 경험과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우리나라 말 중에 고맙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면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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