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손절러

없는 번호입니다

by 도씨



어렸을 때, 아니 지금보다는 어린 과거의 나는 인연을 아주 쉽게 여겼다.

어느정도 우정과 시간을 쌓아온 관계더라도

나만의 기준(이젠 그게 뭐였는지도 기억 안나는)에서 벗어나면

바로 요즘 말로 '손절'을 하였다.


과거의 나에 관해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내가 아주 손쉽게 사람들과의 연과 손을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다.

이제 너랑 놀지 않아! 라는 경고도 없이 .

아주 일방적이고 잔인하다못해 칼 같은 손절이었다.


방식은 이랬다.

저장된 번호를 원하는 사람 빼고 다 지운다.

같은 핸드폰이지만 전화번호를 새로 바꾼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가진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하려다가

'없는 번호입니다.'란 기계적이고 차가웠을 손절 메세지를 듣게 된다..


내가 그렇게까지 잔인했던 것은

먼저 손절과 외면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도 좀 있었지만

초라하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었던 나의 은둔형 외톨이 20대 시절이 부끄럽고 철없어서였다.


인연의 관리나 소중함보다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지키려는 철없는 선택이었다.


먼저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서 더 더 은둔하여 숨을 수 있었고,

숨을 수록 돈 만원, 이만원이 없어 친구들 만나지 못하는 내 주머니 사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기계음으로 손절을 선택하면서 딱 한번 내가 그런 경우를 당한적이 있다.


대학내내 시간표도 같고 어울려 다니던 네명의 대학동기들있었는데,

잠수를 타다가 나만의 손절법대로 손절을 했다.


그런데 웬걸.

나를 생각보다 더 소중히 여겨주던 그 친구들은

내가 예전 남자친구와는 연락을 하는 것을 알고, CC였던 그 남자친구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어왔다.


첫 소식은 그 중의 한명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기쁘게 축하했을면 됐을일인데...

나는 전화를 받기전 대충 내용을 남자친구에게 전달받고, 전화오면 받을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또 그들을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


축의금만 전달할테니 계좌번호 알려줘.

란 말에 친구는 오지 않아도 된단 말만 남기고 상처 받아 떠났다.

나머지 친구들도 상처를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변명하자면, 이미 직장도 다녀 꼬박꼬박 월급 받는 사회인이 된 그들을 마주하는 것도,

결혼식장에서 다른 동기까지 다 만나 내가 아직 은둔형 외톨이임을 밝히는 것도,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럼 말이라도,

내가 이러이러한데 이래저래해서 축의금만 보내면 안될까?

라고 지금이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상처를 그렇게나 퍼주고 나는 그 뒤로 그들과 연락이 끊겼다.

손절 했다기보단 손절을 당했다가 맞을 것이다.


그런 식의 절교는 그들에게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외로움에 시달리면서 후회하고,

그들을 그리워하고 보고싶어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친구들을 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끄러운 나를 숨기고 싶고,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버리고 싶은 것은 나였다.


게다가 인연의 연결고리를 지운다고 외로움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번호는 바꾸어버리면 그런 인연은 쉽게 다시 생기지 않았고,

그리움도 바뀌지 않았다.


관계를 끊어내며 숨을 곳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곳은 숨을 수 있는 방이 아니라 혼자 남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 놓아버렸던 많은 관계들을 추억하며

재회할 수 없음에 가슴아파하게 되었다.


프로손절러에게는 필수적으로 고독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제 내게 가지고 있는 옛날 인연이라고는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된 관계뿐이다.


그래서 다짐한다.


앞으로의 인연은 그 소멸 전까지

먼저 손을 놓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사람에겐 인연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고독이 뒤늦게 내게 가르쳐 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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