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임신과 유산
2015년 11월 협연 이후로 꼬박 한 달 넘게 아팠다.
목소리가 안 나오고 몸살기운이 계속 있었다.
항생제를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서 독한 감기에 걸렸구나 싶었다. 아이들도 번갈아 입원하면서 나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임신 초기 증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혼자 산부인과를 가서 초음파를 보는데
" 아기 심장소리가 조금 이상한데요.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일주일 뒤에 다시 볼게요. "
첫째, 둘째 때와는 다른 심장 소리였다.
병원을 나서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26살에 애가 셋이라니.. 이제 일도 겨우 자리 잡았는데 다시 출산과 육아로 일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해졌다. 26살, 28살 어린 20대 부부였지만, 맞벌이 부부로 지내서 생활하는데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움 없이 지냈다. X의 도박은 금액이 크지 않았고 시어머니가 중간에서 어느 정도 수습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애가 한 명 더 생긴 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막상 아기 상태가 불안정하다 하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기뻐할 수도 기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무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일은 계속했고 둘째가 다니던 어린이집을 옮겨야 했다. 입학설명회 등 일정이 많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병원을 찾았고
" 아기 심장은 정상적으로 잘 뛰네요. 초기에는 그럴 수 있어요. 이제 2주 뒤에 봅시다. 임신확인서 서류 드릴 테니 바우처 신청하세요 "
또다시 2주 뒤 혼자 다시 병원을 갔는데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 어..? 아기가 안 보이네요... 잠시만요 "
그리고
" 아기 심장이 뛰지 않네요... 크기가 2주 전에 초음파 봤을 때랑 비슷한 거 보니 그때 심장이 멈춘 거 같네요. 계류 유산이에요.."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임신 초기에 그럴 수 있어요.. 기형이 있었던 거라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어요"라는 말로 담당 과장님은 나를 다독이셨다. 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섰다. 아마 연말에 아파서 먹었던 약들이 문제가 됐던 것 같았다. 가능성이 1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출근하는 차 안에서 눈물이 났다. 미안함과 죄책감이었을까, 안도감이었을까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아무렇지 않게 눈물을 훔치고 수업을 했고 수술 당일, X와 함께 병원을 갔다. 수술을 잘 마치고 눈 떠보니 회복실이었다.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때 X의 한마디
" 왜 울어? "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X의 동창친구. 수술은 잘했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돈 얘기를 했다.
이미 바우처카드를 발급받은 뒤라 병원비는 바우처로 다 지불을 했는데, X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필요하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 병원에서 했던 말과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정이 다 떨어졌다. 내가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내겐 4살, 2살 아이들이 있었기에 이혼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내 눈앞에는 현실만 보였다. 유산도 출산만큼이나 힘든 거라 몸조리를 해야 했지만, 출산 당일 하루와 주말만 쉬고 다시 일을 했다. 유산으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한 지붕 아래 대화가 없었고, 서로의 살갗이 닿는 것도 싫어했고 남처럼 지냈다. 마치 같이 살기만 하는 동거인처럼. 나는 유산 이후에 일에 더욱 매진해서 점점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타던 차는 팔고 잠시 1~2년 뚜벅이로 지냈는데 일도 많아지고 출퇴근할 때 타던 카쉐어링으로는 한계가 오자 아빠가 직접 차를 사서 인천까지 셀프탁송(?) 서비스로 가져다주셨다. 아들을 무척이나 낳고 싶어 했던 아빠는 첫 손주가 아들이라 이것저것 많이 해주셨다. 첫째의 운동 관련된 교육비는 거의 다 지원해 주셨고 때마다 아이들 옷이며 필요한 것들도 사주시고 용돈도 보내주시고 물심양면 도와주셨다. 표현은 없는 대문자 왕 T 무뚝뚝한 츤데레 아빠이자 외할아버지였다.
차가 생기면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더 많이 돌아다녔다. 어린이집 방학에 맞춰서 나도 휴가를 맞추고 인천-경주까지 혼자 운전해서 아이 둘을 데리고 가서 친정식구들이랑 놀고 오기도 하고 혼자 아이 둘 데리고 롯데월드 오픈런으로 오전 9시 30분에 입장에서 마감시간인 9~10시까지 놀고 집에 오기도 했다. 서울랜드, 강원도 삼척, 여기저기 많이 다닌 것 같다. 친정 식구들과 여행도 자주 갔다.
(어릴 때 나와 내 동생도 아빠 손에 이끌려서 많이 돌아다녔다. 롯데월드 오픈런은 내가 어릴 적에 아빠의 루틴이었다. 롯데월드 연간이용권을 끊어서 강원도에서 왔다 갔다 했으니 나보다 더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갈 때마다 집돌이 X와 갈등이 있었다. 특히 X는 엄청난 집돌이로 축구할 때 빼고는 집 밖을 잘 안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밖으로 나도는 성격이었다. 엄마 말이 7살 때 집에서 집안일하고 있으면 동생은 엄마 껌딱지였고, 나는 문 열고 혼자 아파트 놀이터 가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굳이 쉬는 날 왜 밖에 나가야 하냐는 X와 쉬는 날에라도 바람이라도 쐬고 놀아주고 싶은 나와 늘 실랑이를 벌이며 외출마저도 감정소모가 많았다. 이게 살면서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연애 때는 뭐든 다 맞춰주고 좋게만 보였으니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도박문제가 수습이 되면 다시 터지고 반복되면서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박은 도박장에 가서 하는 도박인데 X가 하던 건 핸드폰으로 하는 사행성 도박으로 sns에서 흔히 광고하는 불법 도박이다.
그리고 나는 친정아빠한테 이런 사실을 그제야 말하며 이렇게 계속 살아야 되냐고 이혼을 고민한다고 했다. 아빠는 반대했다.
"여자 혼자 아들 둘을 키운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교회도 데리고 나가보고 기도하고 본인이 의지가 있으면 도박도 병이라 치료해야 한다. 돈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신앙적으로 해결을 해보자."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리니 현실적으로 이혼을 힘들다고 판단한 우리 가족들은 도박을 끊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이혼보다는 X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해다. 시댁은 이미 시어머니가 시아버지 모르게 많이 수습해 주던 상황이라 한계에 다다랐고, 시아버지는 나 몰라라 하셨다.
제일 먼저 X한테 핸드폰을 바꾸자고 했다.
아무래도 핸드폰으로 인터넷이 가능하고 뱅킹이 가능하니 애초에 도박을 할 수 있는 경로와 루트를 원천차단하자는 게 내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X는 절대 핸드폰은 못 바꾸겠다고 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도박중독치료센터도 알아보고 단도박 모임도 나가고 어떻게든 해결을 해보고자 여러 시도들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