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중독
2015년, 25살 나는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며 평일에도 주말에도 일을 했다. 일하면서도 아이들 이유식과 반찬은 다 해 먹였다. 다행인 건 요리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10대 때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엄마가 투병 중에는 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으니 요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양가 어른들도 바쁘셔서 살림을 도와주는 것도 아이를 전적으로 봐주시는 게 아니었다. 평일 하원 이후 몇 시간 봐주시는 돌봄 선생님이 도와주시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인천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차를 처분하고 뚜벅이로 아이 둘을 키웠다. 둘째는 아기띠를 하고 첫째는 손 잡고 장 보러 가면 장 본 거 들고 버스 타거나 걸어가거나 그렇게 힘 센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X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 나아질 줄 알았던 상황이 더 악화되어 갔다. 돈이 생기니 월급으로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X의 공인인증서도 내가 갖고 있고 통장도 내가 관리하며 용돈을 줬는데 뒤에서 몰래 하는 것까지는 내가 알아낼 여력이 없었다. 안 하겠다고 하지만 말뿐이었다.
안 하겠다는 말을 못 이기는 척 믿고 어쩌면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하겠지, 정신 차리겠지였던 거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시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제일 화가 났던 건 그렇게 도박을 하고 다니는 와중에 본인 노는 것은 해야 했다. 매주 주말마다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 2번 이상 주말에 공 차러 나가는 건 시키지 않아도 나가더라. 어쩌다 한번 애들 둘 데리고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한바탕 싸우고 난리가 났는데도 공 차러 가야 한다고 나가는 그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아이 둘 과 셋이 함께 주말을 보냈다. 주말에 X가 집에 있어도 아이들 데리고 놀이터 한번 나가는 것도 손에 꼽는다. 결국 놀이터 나가는 거 하나로도 실랑이를 벌이는 게 일상이었고, 그런 감정소모가 싫어서 그냥 내가 데리고 나갔다. 일하는 엄마라 미안함과 죄책감에 쉬는 날에는 힘들어도 어디든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고 싶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고 지속되니 점점 나는 지쳐갔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하루는 여동생 부부랑 아이들 데리고 서울대공원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전날까지 친구들이랑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진탕 마시고 술병이 나서 X는 결국 차에서 자고 내가 혼자 3살, 16개월 아들 둘을 데리고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둘째 등 뒤로 아기띠 하고 첫째는 앞으로 안고 유모차 끌고 하루 종일 혼자 아들 둘을 데리고 돌아다녔다. 화가 났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 되니 나도 지쳐갔고, X는 냉담하고 차가워진 나의 모습에 불만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왜 차가워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좋은 기회로 협연을 하게 되었다.
40개월 된 첫째와 21개월 된 둘째를 키우며 일하며 연주 준비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전에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짬 내서 연습하고 출근하고 시간 될 때 레슨 받으러 다니고 그렇게 연주 준비를 했다. 3살 첫째를 데리고 합주를 다니고 리허설을 가고 연주 당일에도 아이를 데리고 샵을 다녀오고 드레스 찾아오고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다 리허설 마지막 합주 때 백지가 되는 상황이 왔다. 한 번도 실수가 없었는데 연주 당일 리허설에서 멘붕이 왔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계속 악보 체크하고 긴장상태였고 다행히 무대 올라가서 연주는 무사히 마쳤다. 80장의 초대권이 다 나갔고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시부모님, 여동생 부부와 할머니, 할아버지 일하던 학원 원장님, 가르치는 학생들, X의 지인들까지
" 너무 멋있다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일하던 학원 원장님이
" 선생님 진짜 대단해. 어린 나이에 애 둘 키우는 것도 대단한데 그 와중에 협연까지 하다니 "
원장님도 아이가 있고 일을 하니 내 상황이 어떤지 너무 잘 아셔서 그랬던 거 같다.
4학년 졸업연주 때도 눈물을 쏟았는데 이번에도 연주를 끝내고 내려와 눈물이 쏟아졌다. 잘 마쳤다는 안도감, 그동안 준비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졸업 이후로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무대를 섰다는 감사함과 무대 위에서의 화려한 모습과 아이 둘과 아등바등 사는 현재 삶과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내가 먼저 몸살을 앓았고 첫째가 입원하고 퇴원과 동시에 둘째가 입원했다.
약 한 달 가까이 고생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집 밖에서의 나의 모습과 나의 결혼 생활의 간극은 점점 벌어져갔다. 시간이 지난다고 이 상황이 나아질 거 같지 않았다.
어른들 말 틀린 게 하나 없더라.
" 여자, 술, 도박은 절대 못 고친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의 25살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