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투 연재 7
간단한 도표나 숫자가 장황한 글보다 더 설득력 있을 때가 많다. 경제나 경영 분야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매출이나 손익과 같은 기간 개념의 수치에 비하여 자산이나 부채 같은 재무상태를 나타내는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예를 들어, 어떤 기간 동안 가계소득의 분위별 통계는 정기적으로 발표되지만, 소득 분위별 가계의 자산과부채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그렇지 않다. 복식 부기의 장점은 모든 거래가 대변(오른쪽)과 차변(왼쪽)에 대칭 관계로 기록되어 기간 손익과 자산 구성의 변화를 교차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나는 대학에서도 재무제표론을 공부했지만, 고백하건대 재무상태표(Statement of Financial Position)의 유용성에 대하여 눈을 뜬 것은 졸업 후 기업신용 분석가(Credit Analyst)로 몇 년간 일하면서였다.
한국은행이 매달 발표하는 <금융안정보고서>에는 민간신용/명목GDP 비율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는 실적 기간 실적인 명목GDP와 자산구성 개념인 신용과의 하이브리드 지표이다.) 이 지표는 명목 국내총생산 대비 민간(가계+기업)의 신용(빚)이 얼마나 많은지 나타낸다. 이 레버리지 비율은 1991년 1분기 121.6% 에서 2016년 3분기 197.8% 로 지속 상승하였다. 국내총생산에서 민간부문의 빚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으면 소득에서 이자로 나가는 금액이 많아서 실제 소득은 줄어들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이 비율은 160% 수준이었다가 고강도 구조개혁과 고통스러운 내핍 과정을 거쳐 140%까지 내려왔었다. 그 이후 다시 180% 언저리로 상승하다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잠깐 주춤하는 듯하더니 다시 200% 가까이 급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 나라 경제 레버리지 비율은 계속 상승할 수 없을진대, 우리 경제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을까. 아니면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을까.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보고서>는 가계 부채에 대하여도 여러 데이터를 제공한다. 가계 중에서 취약 차주의 대출 비중은 2016년 3/4분기 말 현재 전체 가계대출의 약 6.4%(차주 수 기준 8.0%)이며 대출규 모는 약 78.6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취약 차주를 다중채무자(3개 이상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이면서 저신용(7-10등급) 또는 저소득(소득기준 하위 30%) 차주를 취약 차주로 정의한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행은 앞으로 대출금리 상승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언급하면서도 전체 가계부채 및 금융기관 전반의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대출금리 상승은 상환능력이 부족하고 변동금 리 대출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신용, 저소득, 다중채무자 등 취약 차주를 중심으로 이자상환 부담을 증대시키고 관련 대출의 건전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전체 가계부채 중 취약 차주 비중이 크지 않고, 그간 정부·감독당국이 가계부채 관리 노력을 강화해온 점 등에 비추어 현시점에서 대출금리 상승이 전체 가계부채 및 금융기관 전반의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금융부채 보유 가구의 경우 금융 자산 규모가 금융부채를 상회하고 있어 금리 상승 시 가계의 이자 수지는 중장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1]
그러나, 조금만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느낌은 달라진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에 의하면, 2015년 우리나라에는 158.3만 한계가구 [금융부채가 금융자산보다 많고 처분 가능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 비율(이하 DSR)이 40%를 초과하는 가구]가 있고, 이들의 DSR은 105%이며 금융부채는 금융자산의 2.6배에 달한다. 158.3만 한계 가구는 금융 부채를 가진 전체 가구의 14.8%에 해당한다. [2] 금융부채가 있는 가구 중에서 한 해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오롯이 빚 갚는 데 사용해도 빚이 줄지 않는 가구가 7 중의 1이라는 의미이다. (금융부채가 없는 가구를 포함한 전체 가구 중에서 한계 가구 비중은 8.5%이다). 앞으로 금리가 오르면 더 많은 가구가 한계가구로 내려갈 것이다. 얼마나 숨이 턱 막히는 현실인가.
오늘의 경제 현실로부터 1997년 또는 2008년의 데쟈뷰를 떠올리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그 현상을 설명했던 어빙 피셔의 부채 디플레이션 및 민스키 모멘트의 개념을 다시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3] 신용(부채) 과잉이 언젠가 경제 전반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수학적인 모델을 이해할 지적 전문성이 내게 없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제이론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경제의 신호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학문적 엄밀성은 갖추지 못해도 시대를 읽는 신호는 식별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가계부채가 소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부채는 유동성을 증가시켜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와 채무 상환 부담 때문에 소비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동시에 있는데, 2010년 이래 처음으로 작년 하반기부터 후자가 전자보다 커지고 있다고 했다. [4] 이 얘기는 금융위기 이후 유동성을 증가시켜 경기 회복을 꾀하는 금융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마침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심리지수(CCSI)를 보면, 작년 4분기 이후 100 이하로 떨어져 올해 1월 현재 93.3이다. 금융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이래 최저치에 해당한다. 소비자심리지수는 전국 2천 가구 이상을 대상으로 생활 형편과 전망, 가계수입과 소비지출의 전망, 현재 경기에 대한 판단과 향후 경기에 대한 전망을 종합한 결과이다.
우리는 과도한 부채 특히 중하위층의 부채 문제를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가계 부채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정부 정책 또는 금융시스템에 의해 구조적으로 생겨난 부분이 많기 때문이요, 둘째, 이들의 가계 부채 위험이 현실화되면 경제 전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보다 최근 연구로는, 프린스턴 대학 경제학과 아티프 미안 교수와 시카고 대학 부스 경영대학원 아미르 수피 교수가 2008년 금융 위기와 뒤이은 대침체에 대하여 적용한 레버드 로스 (levered lossed) 프레임워크 이론이 매우 설득력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빚진 사람들은 저소득층이고 이들은 한계소비 성향이 크다. 레버리지가 높은 경제에서 자산 가격이 급락하면 빚진 사람들에게 손실이 집중된다. 자산을 담보로 잡고 있는 투자자는 빚진 사람의 주택에 대하여 선순위 청구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손해가 적다. 한계 소비 성향이 큰 사람들에게 손실이 집중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손실이 균등하게 배분되는 경우보다 소비지출의 감소가 더 크게 일어난다. 그리고 압류로 인하여 집값 하락의 충격은 더욱 커지게 되며, 결국 생산이 줄고 실업이 증가하는 경제적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경제의 구성원들이 빚의 유무에 따라 이질적이다…(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그 이후 경기 침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호황일 때 아무런 빚이 없던 가계도 불황과 함께 수요가 감소하면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 레버드 로스로 초래된 경제 위기를 논할 때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집을 산 결과이므로 그 사람들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도덕적 훈계는 위기 상황에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버드 로스는 경제 전체로 빠르게 퍼져 가며 빚을 진 가계의 수요 감소는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5]
금융기관은 저축자와 채무자를 연결한다. 누군가의 저축은 누군가의 빚이다. 빚진 자의 재무상태표 대변은 저축자의 재무상태표 차변이다. 그렇게 모든 가계는 재무상태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14.8%의 한계가구는 전체 금융부채의 29.3%를 지고 있는 반면 전체 금융자산에 대하여는 9.4%밖에 갖고 있지 않다. 한계가구는 소득으로도 부채를 줄일 수 없고 금융자산도 별로 없기 때문에 실물자산을 팔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압류(foreclosure) 및 할인 판매(fire sale)가 사태를 악화시키면 미안 교수와 수피 교수가 말한 대로 모든 자산 가격이 하락하고 또 다른 경제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가 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따지고 보면 비합리적인 것이 많이 있다. 자기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모든 가정의 소망이다. 그리고 주택은 보통 가정에서 가장 큰 자산이다. 전월세 가격이 안정되어 있으면 주택 구매에 대한 동기가 줄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평생 일해서 모은 자산의 가장 큰 몫을 주택이나 아파트 마련에 넣는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자기 자본과 (금융기관을 통한) 타인 자본과의 계약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때 맺는 금융계약은 불합리하다. 주택 가격의 하락에 따른 위험을 전적으로 차입자가 지기 때문이다.
금융기관(투자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택담보대출은 아주 매력적인 투자처이다. 정해진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원금은 부동산(주택) 가치에 의해 대부분 보호받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험은 부동산 가치의 하락인데, 이는 주택 가격의 일정 퍼센트까지는 주택의 법적 소유자가 모든 손실을 안게 된다. 즉 금융기관(투자자)은 선순위 청구권을 갖고 있는 반면, 평생 모은 돈을 집어넣은 법적 소유자는 자기 집에 대하여 후순위 청구권을 갖는다. 그리고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때 선순위자는 그 재산을 압류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사회는 원래 이렇게 비참한 곳인가. 적어도 백만이 넘는 가구가 이런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금융은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데(de-risking) 소홀하다.
가계의 재무상태표가 금융효율성의 시금석
금융의 본질적인 목적은 고객의 재무상태표를 종국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대출도 마찬가지이다. 주택담보대출 등 대부분의 채무계약은 그 위험을 차입자와 저축자(은행) 및 정부가 나누는 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저축자와 은행이 일정정도 위험 손실을 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한계 가구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와 상가에서 쫓겨나는 압류법도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에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공급하며 자산의 질을 개선시켜 주었다. 하지만 금융기관을 구제해서 가계를 구제하는 것이 맞는 생각이었을까. 금융기관에게 했듯이 가계의 재무상태표를 직접 개선하고 유동성을 공급할 수는 없었을까. 가계를 구하는 것이 금융기관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오늘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어떤 금융 전문가는 앞으로 자산을 헐값에 살 수 있도록 현금을 비축하라고 한다. 경주 최씨 가문에는 집안을 다스리는 여섯 가지 기준(육훈)이 내려온다. 그중에 세 번째는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이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모두를 위한 금융효율성은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1] 금융안정보고서, 한국은행, 2017.1. P.28
[2] 이준협, 가계부채 한계가구의 특징과 시사점, 현대경제연구원, 2016. 3. 18. (참고로, 한계가구에 대한 한국은행의 수치는 조금 다른데, 2015년 기준 134.2만 가구이다.)
[3] 부채 디플레이션: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가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설명하면서 만든 개념으로, 자산가치 하락에 따른 경기침체를 의미하는 자산 디플레이션과 비슷하지만 부채가 경기침체를 가속화시킨다는 것이 특징이다. 부채 디플레이션은 부동산 등 보유자산의 가치가 하락하여 이를 모두 처분하더라도 갚아야 할 부채가 많이 남은 경우, 부채상환 부담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줄어들어 실물경제에 타격을 안기는 구조를 가진다. (뉴스핌, 조동석 기자. 2016. 8.4)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 은행 채무자의 부채상환 능력이 악화되어 결국 건전한 자산까지 팔게 되면서 금융위기가 도래하는 시점을 말한다. 미국 경제학자 하이만 민스키(Hyman Minsky)가‘금융 불안정성 가설’에 따라 제기한 이론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목받고 있다. 하이만 민스키에 따르면 금융시장이 호황기에 있으면 투자자들은 고위험의 상품에 투자하고, 이에 금융시장이 탄력을 받아 규모가 확대되고 자산 가격도 증가한다. 그러나 이후 투자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수익을 얻지 못하면 부채 상환에 대한 불안이 커지게 된다. 이에 따라 금융시장이 긴축되고 자산 가격이 떨어지면서 금융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4] 조규림 등, 가계부채가 소비에 미치는 영향, 현대경제연구원, 2016. 11.18
[5] 박기영 번역, 빚으로 지은 집 4장, 2016 [원작 Atif Mian & Amir Sufi, Houe of Debt,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