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해.
특히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진중하고 점잖아 보이잖아.
말이 많으면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자칫하면 실수도 하게 된다고.
과묵한 오빠들 틈에서 자라 나는 말이 별로 없잖어.
그런데 말 많은 이 남자와 30년을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점점 말 많은 사람이 되어가지 뭐니.
좋은 점이나 닮아갈 일이지 참 나...
우리 집 남자 별명은 방송국이야.
이 남자 형이란 작자의 별명은 떠벌이지.
별명만 들어도 대충 그림이 나오지?
두 남자가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본드를 입에 붙여버리고 싶다니까.
아무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로도 한 시간을 떠들어대는 남자들 수다에 토가 나올 지경이야.
우리 집 남자의 가벼운 입은 우리 가정사를 퍼뜨리는 주범이기도 해.
우리집 대부분의 일을 친정이모들에게 전하는 일도 이 남자의 주둥이야.
주책도 가지 가지지?
어떤 남자가 처 이모들한테 날마다 전화를 하냐.
야!
니 남편이 그러면 넌 좋겠냐?
뭐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도 마라.
자기 집안 사돈에 팔촌까지의 소식도 나한테 말한다니까.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들어야 한다구.
이 남자의 가벼운 입은 통제 불능이야.
우리 오빠들이 이 남자의 가벼움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기 전부터 아주 못마땅해했어.
우리 큰애 태어났을 때
막내오빠가 1년 정도 우리집에 얹혀 살았잖아.
그나마 막내오빠는 이 남자의 가벼움을 자상한 성격으로 받아줬지.
우리 애들이 대여섯 살 됐을 때 둘째 오빠가 이혼을 했잖냐.
그때 잠깐만 우리 집에 있는다는 게 6개월이나 같이 지냈다니까.
둘째 오빠가 이 남자를 제일 미워 했어.
말도 너무 많고 아주 특이한 사람이라고 싫어라했지.
오빠가 그때 이 남자를 그나마 덜 미워한 것 같아.
아마도 본인이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남자 볼 면목이 없었을 거야.
우리 애들 초등학생 때는 친정아버지랑 6개월을 같이 살았잖아.
이 남자가 휴일마다 장인이랑 목욕탕도 가고 산에도 가고 시장도 가더라.
장인한테 뭔놈의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찰싹 달라붙어 쫑알대면서 아버지를 챙기더라고.
난 울아버지라도 같이 사는 거 진짜 힘들었거든.
작년여름에 우리엄마가 아파서 우리 집에 오신거 알지?
이 남자가 장모를 모시고 바람도 쐬러 가고 병원에도 다니면서 마치 자기 어머니 모시듯 했어.
원래 이 남자는 장모랑 수다로 날밤새는 사람이잖아.
울엄마 서울에서 혼자 살 때도 이 남자가 하루에 세 번씩 꼭 전화했다니까.
어떤 사위가 장모한테 그런다니, 아들들도 안하는데.
올봄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엄마한테 참 잘 했어.
그걸 생각하면 진짜 고맙긴 하지.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실 때 오빠들이 자주 왔었어.
올 때마다 특히, 둘째 오빠가 대놓고 이 남자를 구박했어.
이 남자는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말이 많아져.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자기 말만 하잖아.
그러니 오빠들 눈에 얼마나 못마땅했겠어.
어느 날은 재활용함에서 주워온 옷을 자랑삼아 오빠들한테 말했다가 된통 당했다니까.
이 남자가 구멍 난 곳에 테이프를 붙여서 입었잖아.
그것도 두 군데나 말이야.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말지.
내가 미쳐 진짜.
무슨 궁상이니.
나도 이 남자 말 많은 거 아주 싫거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이 남자, 나한테 구박받을 때와 친정오빠들한테 구박받을 때 모습이 다르더라.
나한테는 당당하게 맞받아치는데 오빠들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이 남자가 고소하면서도 묘하게 짠하더구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올 때마다 이 남자를 구박하는 오빠들이 영 못마땅하면서 슬금슬금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오빠들하고 한바탕 했잖아.
오빠들이 결국 이 남자한테 사과하긴 했어.
그래도 이 남자가 울 엄마를 마지막에 모신 사람이잖아.
참... 부부란 것이 뭔지, 그쟈?
친구와 긴 통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이혼하자, 이혼해!
-장모님도 이제 가고 없는데 이혼하자!
엄마가 돌아가신지 한 달만에 이 남자가 나한테 한 말이다.
싸운이유는 기억에도 없고 이 말만 가슴에 몽우리가 되었다.
이 남자의 가벼운 입이 무거울 때가 있다.
아무리 크게 부부싸움을 해도 하지 않는 이야기.
내 심장을 들쑤시는 험한 말을 하면서도 안 하는 이야기.
처가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힘들었을 이야기.
얼마든지 큰소리치며 생색낼 수 있는 이야기.
처남들의 구박에 수치스러웠을 이야기.
아무리 화가 나도 하지 않는다.
나 같으면 퍼부었을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남자의 주머니를 본격적으로 뒤지게 된 것은 10년 정도 된 것 같다.
아이들이 군대에 가고부터 이 남자가 딴 주머니를 차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도 천 원짜리 몇 장만 꺼냈는데 도둑질도 느는지 하다 보니 점점 간이 커진다.
오천 원을 꺼내가도 이 남자가 모른다.
급기야 만 원짜리에 손을 댔다.
그래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십 년 가까이 비밀스러운 도둑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나의 도둑질을 말하고 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던 이 남자가 쑥 끼어들면서
-아이고, 내가 모른 줄 알았냐?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바보냐, 그걸 모르게!
세상에, 세상에나!
가벼운 이 남자가 어찌 참았을꼬?
말하고 싶어서 어찌 그 긴 세월 참았을꼬?
한두 해도 아니고 자그마치 십 년이다.
입이 근질거려 어찌 참았을꼬?
옆에서 배꼽 잡는 친구 왈
-푼돈을 슬금슬금 도둑질한 마누라 귀여웠나 보다. 알고도 눈감아주고 니 남편 진국이다야!
와, 와...
그날 나는 가벼운 내입을 다물지 못했다.
엉큼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의 무거운 입.
지금 나는 그 남자의 주머니를 대놓고 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