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 5%

by 김봄빛


벽에 걸린 그림 액자 속 예수님이 일어섰다 앉았다 했다. 내 인형은 저 혼자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헛것들을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하굣길에 부슬비를 좀 맞았던 나는 춥고 졸렸다. 낮잠을 한숨 자고 깨어났는데 40도가 넘는 고열에 내 몸은 불덩이가 되어 있었다. 놀란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한걸음에 대학병원으로 달려가셨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지난 해 앓았던 장티푸스가 재발한 듯하다고 해열제를 처방해 주셨다. 전 해에 장티푸스로 입원해 주사와 약으로 치료를 받고 퇴원한 적이 있으니 엄마도 그런가 보다 하고 내게 해열제를 먹이셨다. 그 때만 해도 그 누구도 앞으로 벌어질 엄청난 일에 대해선 상상하지 못했다.


열이 내렸다. 그런데…,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목 아래부터 나의 온 몸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지경이 되었고 오직 덥고 추운 정도를 느낄 수 있는 감각만이 살아 있어서 ‘엄마, 더워요. 이불 벗겨 주세요.’ ‘엄마, 추워요. 이불 덮어 주세요.’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혼비백산 하신 부모님은 축 늘어진 나를 데리고 양의, 한의를 구분하지 않고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니셨으나 의사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병명은 ‘모르겠다’, 치료법도 ‘모르겠다’였다. 아버지는 느지막이 낳은 첫 딸을 그렇게 포기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연자실한 채 두 세 달이 흘렀다.

어느 날, 손가락을 까딱할 수 있게 된 나는 뒤이어 발가락을, 그리고 팔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 되었고. 나를 학교에 결석시키지 않으려고 엄마는 걸어서 15분 거리의 학교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때로는 나를 업고 걷고, 때로는 차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엄마는 내가 혼자서는 화장실 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으니 학교에 상주하다시피 하셨고, 외할머니께서 동생들과 집안일을 돌보러 내려오셨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얼마 후엔 엄마는 등하교만 시켜주셨고, 학교 생활 중에는 엄마 대신 선생님께서 화장실이나 과학실, 도서실로 나를 업고 다니셨다. 아직도 기억난다. 고마운 김순련 선생님. 2학년 늦가을 즈음이 되자 나의 상체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불안한 걸음걸이지만 혼자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나의 두 다리는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내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이상했다.


소풍은 차로 다녔고 체육 실기시험은 필기로 대체되었다. 뛸 수 없었고 전반적인 하체기능이 남들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학교생활은 할 만했다. 넓은 대학 교정도 다 누비고 다닐 수 있었고 남들보다 힘들었지만 계단 오르기도 할 수 있었다. 내 곁에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나를 돌봐주는 몇몇 친구들이 늘 함께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걸 ‘인복’이라 불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우리나라에 CT와 MRI가 들어왔다. 병명이 밝혀졌다. ‘척수신경염’이었다. 척수에 이 병을 앓고 지나간 흔적이 보인단다. 척수신경염을 앓은 환자 중 3분의 1은 완전히 회복하고, 3분의 1은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게 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전혀 회복하지 못 한다고 한다. 반타작은 한 셈이다. 다 회복 할 수 있었으면 너무 좋았겠지만, 반타작도 기적이다.


대한민국에 장애인 수가 전체 인구의 5%라고 한다. 스무 명당 한 명 꼴이니 그리 희귀하지도 않다. 어쨌든 나에게 온 확률이니 끌어안고 살밖에.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기능을 잘 못하지만 몸이 자람에 따라 같이 자라준 내 다리에 감사하고, 부실한 다리를 가졌지만 당당한 내 정신력에 감사하고, 불편한 다리를 도와 잘 살아 준 나의 몸에 감사한다. 나를 바르게 키워내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제 몸 돌보듯 나를 돌보아 준 내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두 다리를 앗아가셨지만 다른 많은 것들을 부어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다만, 이제 나이가 들어 점점 더 약해지는 내 다리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나 김봄빛은 불쌍하지 않은데, 나의 다리는 자주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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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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