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동네에 살던 스무살 난 청년, 영호. 그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앞집에 살았다. 나보다 열 살 가량이나 많던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와 또래인 옆집 자매들이 놀고 있는 우리 집 앞 골목으로 와서 우리가 노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곤 했다. 그의 한 쪽 팔은 팔꿈치에서 접혀져 부목을 한 듯 그의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고 얼굴은 자의와 무관하게 때때로 일그러졌다. 그의 몸은 불편한 한 쪽 다리 때문에 걸을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우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때때로 어눌한 말솜씨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아 그냥 못 들은 척하기 일쑤였다. 우리와 어울릴 수 없던 그는 멀찌감치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중년의 어른들이나 입을 법한 헐렁한 천 바지에 허름한 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골목에서 놀고 있는 걸 용케 알고 그곳으로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는 그의 방에서 우리 노는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어이없게도 그를 ‘영호야’라고 불렀다. 그가 처음 그의 엄마를 대동하고 우리 골목에 나타났던 날, 그의 엄마가 그를 “영호야"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로 보아 큰 오빠 내지는 삼촌뻘인데 우리는 왜 마치 또래인 양 그의 이름을 불렀을까? 그를 무시해서라기보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 게다. 영호와 대비될 만치, 푸른빛이 감도는 예쁜 홈드레스를 입었던 그의 엄마는 그날 처음 모습을 보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있고 장애인을 고용하는 회사도 있지만 50 년 전 건강한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들던 그때, 맞는 학교도, 맞는 직장도 찾을 수 없었던 그의 하루하루는 어떠했을까.
장애를 가진 자녀는 부모의 남다른 보살핌으로 커간다. 7 살 이후부터 장애가 있는 내가 지금의 이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건 부모님의 인내와 아픔이 서려있는 뒷바라지 덕분인 줄 안다. 해마다 빠짐없이 나의 친구들을 불러 열어주신 생일파티며, 때마다 학교로 찾아가 학급에서 필요한 일들을 맡아서 해주셨고, 먼 길 마다 않고 용한 의사가 있다하면 어디든 찾아 다니셨다. 가족이 가는 곳이면 항상 나를 앞장 세워 데리고 다니셨으며 나의 장애를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몸에 칼 대는 걸 극도로 꺼렸던 아버지는 한방으로 나를 고쳐보겠노라고 한의학 서적을 섭렵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항상 아버지의 아프디아픈 손가락이었다.
영호의 어머니는 왜 그에게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그녀의 집은 2 층 양옥으로 꽤 부유해 보였는데, 왜 아들에게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잠바때기를 입혀 이웃 골목의 한참 어린 여자아이들이 노는 곳에 머물게 했을까? 왜 아들을 살피러 우리가 놀던 골목으로 자주 와 보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영호와 잘 지내기를 왜 부탁하지 않았을까?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예전엔 아픈 자식은 부모의 업보라 생각했단다. 말인즉슨, 전생에 나쁜 짓을 저질러 그 과보로 몸이 불편한 자식이 태어나거나, 또는 몸이 불편한 사람 자신의 과거 업보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 했단다. 그런 이유로 장애아인 자식을 숨기기에 급급했나보다. 권위 있는 케네디가의 큰 딸이 저능아였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케네디가의 수치로 여겨 숨겼다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애인은 이래저래 서러웠다. 몸에 장애가 있는 것도 힘든 판에 막연한 억측으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야만 하다니. 건강한 이들이여, 가진 자의 도리로 너무한 처사 아닌가.
“영호 아재! 내 예전엔 너무 어려 철이 없었어요. 이제 나이 들어 옛 일을 뒤돌아보니 아재를 아재라 부르지 않은 어리석음이 부끄럽고 후회 됩니다. 미안했어요. 부디 아재의 삶이 너무 고단하지 않았기를, 앞으로도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