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의 사이에서 9
이번엔 +84와 앙증맞은 이모티콘.
그대로였다.
여전히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해놓은 게 아니라 남편이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 여자가 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일 전과 같은 상황에 나는 또 손만 떨고 있을 뿐이었다.
3일 뒤면 남편이 제주도에서 오기로 한 날이었다.
3일만 참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사람이 바람을 피운 거라면 내가 불시에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무엇이든 하나는 나올 거라고.
3일을 기다려서 남편이 오는 날.
난 언제나 그랬듯 공항 주차장에서 주차는 하지 않고 아이를 태운 채로 빙글빙글 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제주도라 비행시간은 짧지만, 그 짧은 비행에도 나는 항상 피곤했었기 때문에 남편도 피곤할 거라 여겨 언제나 30분 전에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남편을 기다리게 하기 싫었던 나의 배려였다.
언제나 당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나에게 습관처럼 배여 버린.
정작 고마워하는 이는 없는 나 혼자만의 배려.
5살인 아이는 자동차가 움직이면 잠을 자지만 주차를 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 울고 보채고 했다.
그래서 그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차에서 잠이 든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면 공항 주차장을 빙글빙글 도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내 습관은 그대로였지만 나의 마음은 달랐다.
차갑고 또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남편을 기다리는 3일 동안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휴대폰에서 증거가 나오면 이혼하기로.
내가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참아줄 수 있는데 바람피우는 건 용서 못한다고.
그건 신뢰의 문제라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는 건 서로에게 지옥일 거라고.
기다리는 동안 결혼생활 중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잘 된 걸지도 몰라.
이혼하고 싶어도 겁부터 집어먹고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나에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꾸만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놓아도 괜찮다고.
남편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밖으로 나오기 5분 전, 주차장을 나와 남편이 얘기한 게이트 번호 앞에 차를 세웠다.
남편이 보였다.
양손 가득 선물도 보였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
당신 정말 바람피운 거 맞는구나.
남편이 조수석에 탔다.
나와 아이가 좋아하는 한라봉차, 유자차, 청귤차, 오미자차를 샀다고 내 눈치를 보며 설명하는 남편을 나는 쳐다만 보고 말았다.
그날은 시댁에 가는 날이었다.
우리는 달마다 시댁을 갔다.
짧으면 1박 2일 , 길면 일주일까지도 있었다.
나는 거기에 불만은 없었다.
내가 부모님이 보고 싶은 것처럼 남편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엄마가 해주는 밥이 생각나는 건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운전을 할 때면 항상 노래를 틀고 흥얼거리는 내가
그날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노래를 틀지 않았다.
조수석에서 항상 잠을 자던 남편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조수석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처럼 우리는 고요했고 차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