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여름, 초록색 야생
장수동의 여름은 '오라이'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하루에 딱 여섯 번. 시내에서 출발한 10번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종점에 도착하는 시간. 그 시간이 되면 종점 상회 앞 평상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긴장감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둘째 삼촌이었다.
평소엔 헐렁한 런닝셔츠 바람으로 마당을 쓸던 삼촌이, 버스 도착 10분 전만 되면 어디선가 깨끗한 남방을 찾아 입고 머리에 물까지 묻혀 넘기고 나타났다.
"야, 서울뜨기. 느이 삼촌 또 저런다."
똥장군이 평상 밑에 숨어 킬킬거렸다. 우리는 옥수수를 뜯어 먹으며 삼촌의 촌극을 구경할 준비를 마쳤다.
저 멀리 신작로 끝에서 파란색 버스 머리가 보였다. 엔진 소리가 쿨럭쿨럭 들려오면 삼촌은 괜히 가게 앞 진열장을 먼지 털이개로 탁탁 털었다. 이미 광이 날 정도로 닦은 유리창인데도 말이다.
"오라이! 스톱!"
버스가 멈추고 앞문이 열렸다. 앳된 얼굴에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펑퍼짐한 회색 유니폼을 입은 안내양 누나가 씩씩하게 뛰어내렸다. 그녀의 이름은 미스 김. 버스 바퀴를 발로 툭툭 차보고, 동전 가방을 짤랑거리며 가게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웬만한 남자보다 씩씩했다.
"아줌마! 여기 사이다 하나 주세요! 얼음 꽝꽝 언 걸로!"
미스 김 누나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가게 안에서 할머니가 나오기도 전에, 삼촌이 번개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병뚜껑을 '뽕'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여기... 있슈."
삼촌이 사이다병을 내밀었다. 그 곰 같은 덩치가 미스 김 누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작아졌다. 미스 김 누나는 사이다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우고는 "크아-" 하고 소리를 냈다.
"총각, 고마워요. 얼마유?"
"아, 아니유. 됐슈. 날도 더운데..."
"어머, 장사하는 집에서 그럼 안 되죠."
누나가 억지로 동전을 쥐여주려 하면 삼촌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그 실랑이를 보던 똥장군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저러다 버스 떠나겄다. 우리가 나서야 안 되것냐?"
우리는 '사랑의 큐피드'가 되기로 했다. 물론 그 방법이 좀 장수동스러웠지만.
다음 날 오후,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나와 똥장군은 버스 뒷문으로 몰래 올라탔다. 손님이 다 내리고 미스 김 누나가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누나!"
똥장군이 불쑥 나타나자 누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녀석들이, 깜짝이야! 차비도 안 내고 어딜 올라타?"
"누나, 우리 삼촌이 누나 좋아한대요!"
내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맞아요! 삼촌이 누나 줄라고 사이다도 맨날 제일 차가운 안쪽에 숨겨놔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버스 밖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삼촌의 동작이 뚝 멈췄다. 미스 김 누나의 얼굴이 사이다병 라벨처럼 푸르스름했다가 금세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이, 이 녀석들이 조그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누나는 짐짓 화난 척하며 손을 들어 올렸지만, 쥐어박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아이코, 삼촌 살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도망치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누나는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고 삼촌은 귀까지 빨개져서 애꿎은 전봇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뒤, 장수동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하늘이 뚫린 듯 퍼붓는 장대비였다. 버스 막차가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빗줄기는 굵어지기만 했다. 가게 처마 밑에서 삼촌은 우산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버스가 전조등을 켜고 들어왔다. 빗속을 뚫고 미스 김 누나가 내렸다. 우산이 없는지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려는 찰나였다.
삼촌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이거 쓰유!"
삼촌은 자기 우산을 누나 손에 쥐여주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빗속을 뚫고 가게로 도망쳐왔다. 누나는 멍하니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젖은 삼촌의 등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바보..."
그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종점 상회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미스 김 누나가 가게 평상에 앉아 콩국수를 먹고 있었고, 삼촌은 그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가게 안에서 혀를 쯧쯧 찼지만, 굳이 내쫓지는 않았다.
그리고 겨울방학 때 다시 찾은 장수동.
부엌 아궁이 앞에는 촌스러운 회색 유니폼 대신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서울 조카 왔니? 배고프지?"
예쁜 둘째 숙모가 된 미스 김 누나가 고구마를 건네주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서 톡 쏘는 사이다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