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종점 상회의 사계(四季)

​[서막: 종점의 풍경]

by Napolia
* 이 소설은 매캐한 매연과 풋풋한 흙내음이 공존하던 1970~80년대 인천 장수동의 비포장도로 끝, '종점 상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장난꾸러기들의 생생한 풍경화입니다.

​버스가 멈추고 안내양 누나가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면, 그곳이 세상의 끝이었다.

인천 장수동 버스 종점. 시커먼 매연과 흙먼지가 가라앉으면, 낡은 미닫이문 위로 ‘종점 상회’라는 간판이 드러났다.

​나의 방학은 언제나 그 미닫이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가게 안은 바깥세상과 공기부터 달랐다. 퀴퀴한 막걸리 냄새와 달큰한 눈깔사탕 냄새, 그리고 은은한 '로션 냄새'. 그 냄새의 주인은 담배 진열장 앞, 카운터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홍미주 여사였다.
​할머니는 1923년생이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할머니는 팽팽했다. 동네 멋쟁이들이 바르는 루즈나 분칠 따위는 없었다. 세수하고 바른 하얀 로션 냄새가 전부였지만, 그 맨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짙은 화장보다 강했다.
​세 번의 결혼, 기구했다던 그 팔자는 어린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게 할머니는, 10원 한 장 틀리면 불호령을 내리는 종점 상회의 절대 권력자이자, 나에게만은 계산 없이 사탕을 쥐여주는 유일한 내 편이었다.
​가게의 명목상 주인은 이 씨 할아버지였다. 그는 이 동네의 논과 밭을 죄다 가진 유지였지만, 가게 일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얀 모시옷을 빼입고 활을 쏘러 다니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할아버지가 국궁장에서 돌아와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하면, 할머니는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흘겼다.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나의 방학은 평화롭고, 뜨겁고, 때로는 나른하게 흘러갔다.
​겨울 방학이면 나는 상회 옆에 딸린 작은 방에 틀어박혔다.
아궁이에 장작을 얼마나 땠는지, 아랫목의 노란 장판은 시커멓게 타 있었다. 그 자리는 엉덩이만 대도 살이 익을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그 '지옥불' 같은 아랫목을 피해 윗목쯤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바닥의 온기가 배를 지지면, 손에는 닳고 닳은 만화책이 들려 있었다. 문풍지가 덜덜 떨리는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만화책을 넘기다 보면, 가마솥에서 밥 짓는 냄새가 고소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름 방학의 풍경은 또 달랐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할아버지의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원두막이 내 아지트였다. 매미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오후, 셋째 삼촌이 밭에서 갓 따온 수박을 "쩍" 하고 쪼개주었다. 원두막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수박을 베어 물면, 달콤한 붉은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멀리 활터 쪽에서 할아버지가 쏘아 올린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발아래로는 초록색 논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할머니는 가게에서 돈 통을 정리하고, 할아버지는 활을 쏘고, 예쁜 둘째 숙모는 부엌을 오가고, 늦깎이 총각 셋째 삼촌은 소를 몰았다. 그리고 나는 까맣게 탄 장판 위에서, 혹은 시원한 원두막 위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흙먼지와 비린내, 그리고 투박한 정이 뒤섞인 곳.
장수동의 풍경화는 그렇게 내 유년의 캔버스 위에 덧칠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