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여름, 초록색 야생
장수동의 낮은 길고 뜨거웠다. 매미들이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오후가 되면, 나와 똥장군은 종점 상회 앞 평상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누워 있었다.
"심심하다. 뭐 재밌는 거 없냐?" 내 물음에 똥장군이 입에 문 강아지풀을 퉤 뱉으며 일어났다.
녀석의 눈이 반짝였다.
"야, 서울뜨기. 너 서리 해봤냐?"
"서리? 그게 뭔데?"
"밤에 몰래 남의 밭에 들어가서 수박이나 참외 따 먹는 거. 그게 맛이 기가 막히거든."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할머니한테 들키면 빗자루 몽둥이찜을 당할 게 뻔했지만, 똥장군의 '기가 막힌 맛'이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결전의 시간은 그날 밤이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보름밤이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굴개굴" 장단을 맞추는 논두렁길을 우리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갔다.
우리의 목표는 마을 어귀, 셋째 삼촌이 애지중지 키우는 참외밭이었다.
"야, 니네 삼촌 밭인데 괜찮냐?" 똥장군이 속삭였다. "몰라, 우리 할아버지 땅이니까 내 거나 마찬가지지 뭐." 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배짱을 부렸지만, 심장은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밭고랑에 엎드리자 흙냄새와 풋풋한 참외 잎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슬을 머금은 참외 잎은 까실까실해서 팔뚝을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다.
"야, 엎드려! 원두막에 누구 있다." 똥장군이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원두막 위에는 희미한 등불이 켜져 있었고, 누군가 부채질을 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셋째 삼촌이었다. 낮에는 소를 몰고 밤에는 참외를 지키는 우리 잘생긴 삼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자락에 맞춰 삼촌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다. 내가 저쪽으로 돌 굴릴 테니까, 너는 제일 큰 놈으로 하나 따." 똥장군이 돌멩이 하나를 밭 저편으로 휙 던졌다. '두둑' 소리가 나자 삼촌이 "누구여?"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타 나는 넝쿨 사이를 헤집었다. 손끝에 묵직하고 매끄러운 것이 닿았다. 참외였다. 나는 똥장군이 가르쳐준 대로 꼭지를 비틀었다. '툭' 하는 경쾌한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잡았다! 요 쥐새끼들!"
갑자기 원두막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삼촌이 밭두렁으로 뛰어내렸다. "튀어!" 똥장군이 소리쳤다.
나는 참외를 가슴에 품고 죽어라 뛰었다. 고무신이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뒤에서 삼촌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이상하게도 발소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헐떡거리며 냇가 다리 밑까지 도망쳤다. "하아, 하아... 살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킬킬거렸다. 달빛에 비친 서로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런닝셔츠는 흙투성이고, 무릎은 풀물로 초록색이 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얼마나 큰 놈인지." 똥장군이 내가 품고 온 참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녀석의 표정이 묘해졌다. "야... 이거 개구리참외(덜 익은 참외)잖아."
달빛에 비춰보니 내가 목숨 걸고 따온 건 주먹만 한, 솜털도 안 빠진 새파란 애기 참외였다. "아니야! 아까 만졌을 땐 컸단 말이야!" 나는 억울해서 소리쳤다. 그때였다.
"그건 덜 익어서 맛없다. 이걸로 먹어라."
다리 위에서 쑥, 하고 커다란 노란 참외 두 개가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위를 올려다보니 셋째 삼촌이 난간에 기대어 씨익 웃고 있었다.
"삼촌!" "이놈들아, 서리를 하려면 제대로 익은 놈을 골라야지. 쯧쯧." 삼촌은 화를 내기는커녕, 잘 씻은 참외를 우리에게 던져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할무니한테는 비밀이다! 얼른 먹고 들어가서 자라!"
그날 밤, 다리 밑에 앉아 똥장군과 나눠 먹은 참외 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아작' 하고 깨물면 입안 가득 퍼지던 달콤한 과즙. 그리고 삼촌이 던져준 훈훈한 정(情). 우리는 입가에 묻은 참외 씨를 훔치며 맹세했다. 다음엔 꼭 수박 서리에 성공하자고.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풀벌레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초록색 물이 든 내 무릎이 훈장처럼 자랑스러웠던, 장수동의 여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