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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y 25. 2019

나를 사랑하게 된 첫 번째 날

"형, 인생은 서대문 밖에 있어요"


8년 만에 만난, 군대 후임이었던 A는 말했다. 서대문 인근에 산다는 걸 용케 기억하고 있다는 기특함보다는, 절절한 현실이 먼저 떠올랐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처음 만난 A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걸 보면. 틀에 박힌 나의 모습.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절제되어 보인다는,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다가도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답답했던 나는.


일상 반경을 넓힌다는 것, 그것은 낯선 경험으로의 도전을 뜻한다. 익숙한 서대문을 떠나 동대문이나 남대문에 가게 되면 예상 밖의 상황과 마주한다. 처음 방문하게 된 지역을 떠올려보자. 두리번거리고, 묻고, 헤매고, 겁이 났던 기억들을.


주저하고 망설이는, 기어코 포기했을 때에는 그만큼의 경험만 얻는다. 서대문의 경계를 기웃거리다가 이내 뒤돌아서면, 되돌아오면 서대문 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장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경험은 선택의 폭을 결정한다. 적은 경험은 협소한 생활로 이어진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도전이라는 과제에서 같은 답만 고집하게 된다. 정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제부터였을까. 불만족스러웠다. 내 삶이, 눈 앞에 펼쳐지는 일상의 풍경이.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갈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대문 안과 밖은 변화에 대한 마음의 경계와도 같다. 삶에 대한 도전을 꾀하면서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건, 마음 안에서만 서성였기 때문이다. 마음 밖, 변화로 나아가는 경험들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낯설었으니까. 두려웠으니까.


도대체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 이렇게도 답답하게 느껴졌을까. 나를 들여다보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요즈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숨은 쉬고 있었으나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상태였으니까.


성숙한 사람은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목석같은 표정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역할에 몰입하며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방황하고 싶었다. 실수하고 싶었다. 서투르고 싶었다.


가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직장에서도 생각은 말했지만,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았다. 삼켜버렸다. 옳은 행동이라고 여겼다. 감정이란 행동을 저해하는, 사사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괜히 들뜨게 하고, 슬퍼지게 만드는 게 감정이라고 받아들였으니까.


상황이 생길 때마다 감정을 느껴보는 연습을 하자 세상이 달라졌다. 나 스스로가 더 이상 목석처럼 인식되지 않았다.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보고 싶었다고, 좋아한다고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일상과 더욱 친밀해진 기분이 든다. 단지 한 것이라고는 내 감정을 느껴보거나 가끔 표현한 것 밖에 없는데.



세상을 향해 기꺼이 나를 내 보일 자신이 생겼다. 방황하고, 실수하고, 서툴러도 괜찮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지적하고 자책했지만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내가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정을 느끼고 머물며 표현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존재를 거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을 더욱 드러냄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더욱 보여주고 싶어 졌다. 감정을 느낄 때마다 표현하겠다는 건 물론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감내해야 될 감정들도 있을 거다. 다만 적어도 이전처럼 감정이 나 스스로에게 외면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아낀다. 존중한다. 그 감정이 때로는 이기적이라고 여겨질 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머무를 수 있다.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과하게 따지기보다는 존재 자체로서 인정하는 마음으로.


인생에서의 변화는 꼭 행동으로만 시작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백수라는 처지에, 빈번히 말을 잘 못하여 면접에서 떨어지고, 변화를 위해 세운 목표를 자주 어기는 나였지만. 어디에 내놓기에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 지지하고, 격려하며, 지켜주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두리번거리고, 묻고, 헤매고, 겁이날지라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늘은 어떤 감정들을 느끼게 될까. 마음에 머무르게 될까, 아니면 표현하게 될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는 있다. 재미있다. 기쁘다. 즐겁다.  


오늘부터 1일이다. 나여서 고마운 하루. 나를 사랑하게 된, 첫 번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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