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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04. 2019

달라진 가족과의 일상

우리 가족의 달라진 풍경을 소개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신다.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는 텔레비전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진다. 어머니와 마주 앉는, 점심식사 시간마다 재밌게 보시는 방송을 소개해주신다. "수호야 이거 이번에 새로 시작한 건데 재밌어"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대화가 주된 패턴이다. 가끔은 소개했던 방송을 처음인 것처럼 알려주실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어떤 내용인데~?" 하며 시치미를 뗀다.


새벽 4시 정도에 하루를 시작하는 아버지는 요즈음 요리에 빠지셨다. 새로 산 핸드폰으로 레시피를 찾고, 직접 구입한 재료로 온갖 음식을 만드신다. 어머니께서 손자들을 챙겨시는 틈을 타고 집 안의 메인 주방장으로 거듭나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어머니께서 요리를 도맡아 하셨었는데, 이제는 어머니께서 "맛있는 것좀 해줘" 라고 말씀하시는 게 낯설지 않다. 나는 "이번 된장찌개 맛있더라"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칭찬을 받은 아버지께서 몇 주간 같은 요리만 해 주실게 뻔하지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집을 익숙한 곳이 아닌 편안한 곳으로 인식한지 며칠 안 되었다.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지만 가족 내에서의 내 역할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간단한 일들만 도와드리다 보니, 소속감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구를 구입하거나, 집안 구조를 바꾸거나, 심지어는 내 방에 변화를 줄 때에도 해 주시는 대로 받아들였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내 의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었다.


내 감정을 느껴보고, 표현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먼저, 부모님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높임말을 써왔다. 또래들보다 빨랐으므로 웃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그러나 칭얼대며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꺼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감정표현에 서투른 나에게 존댓말은 서열을 구분 짓는, 경직된 언어로서 다가왔다. 이야기를 할 때에도 "오늘 상사가 짜증 나게 했어"와 같은 표현을 "오늘 상사 분께서 저의 기분을 상하게 하셨어요"처럼 형식을 갖춰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법에 어긋나긴 하지만, 아버지를 "큰 형님-"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곤 한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대화가 단절되다시피 했다. 특히, 고민을 털어놓는 적은 단연코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보시기에 위험하다거나 아니다 싶은 것들은 못 하게 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꺼내기가 점차 두려워졌다. 어렵사리 꺼내던 말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침묵으로 바뀌어갔다. 응어리진 마음속 언어들을 굳이 말로 꺼내서 갈등을 유발하거나 불화의 씨앗을 싹 틔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달라졌다. 나는 "큰 형님은.."이라는 말과 함께 마음속에 담긴 감정들을 마구 표현하고 있다. 대화를 하다가 생각의 차이가 두드러져도 굽히지 않는다. 물론 나의 잘못된 생각이라면 이내 수긍하지만.


오늘은 급여가 적은 직장에 취업하는 거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부정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과 부정당한 이후의 관계라는 상상을 이겨내야 했으니까. 어렵게 꺼낸 나의 말에 아버지께서는 "너무 돈 생각하지 말고, 네가 뜻한 게 있을 텐데 그걸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대답하셨다. "우리 때는 말이야.." 라며 트여야 될, 그동안 들려주셨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에게도 변화하고 계신 걸까. 수긍하며 방으로 돌아가던 때에 대답이 만족스러운 지 아버지께서는 물으셨다. 나는 5점 만점에 3.2점이라고 말씀드렸다. "헉-"이라는 아버지의 외침이 거실을 잠시 떠돌았다.  


어머니와는 수다 삼배경에 자주 빠진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누가 잘했느니 못 했느니, 어느 프로그램을 봤느니, 못 봤느니 하는 텔레비전 이야기가 대부분의 내용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대화를 나누다가 한 번씩 어머니께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시집을 오셔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생생한 가정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무도 덜어주지 않았던 어머니로서의 무게를 어떻게 견디어 오셨을까. 여리신 성격이라는 걸, 이제는 느낄 수 있는데.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백수로서의 내 존재가 죄송스럽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가까워지며 집 안의 대소사를 잘 알게 되었다. 인터넷 결제나 정보 검색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생활용품이나 가구를 구입할 때 나에게 물어보신다. 애꿎은 쌀만 축내는 처지이다 보니 작은 일이라도 성의껏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자식 된 도리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소원했던 관계에 물꼬가 터졌다. 아직은 어머니께서 옛날이야기를 꺼내시면 낯설고 어색하지만, 과거에 느끼셨을 어머니의 여러 감정들을 조금씩 덜어드리고 싶다.

 

1주일에 한 번씩은 부모님과 식사를 하기 위해 나 스스로와 약속하고 노력한다. 두 분에게는 말씀드리기 멋쩍어 혼자 지키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외식을 했다. 집 근처에 있는 횟집으로 갔다. 어머니께서는 비싸다고 투덜거리시지만, 아버지께서는 회와 소주를 다른 어떤 조합보다 더 아까신다. 회를 먹을 때에도 대화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전날, 토요일 저녁 11시 정도에 집에 들어갔었다. 마침 거실에 앉아계시던 아버지는 "축구 보러 들어왔냐?"라고 말을 건네셨다. 그냥 집에 온 거였는데. 밤이 늦어서 우리 집에 들어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축구를 보러 왔냐고 물으셨다. 그 이야기를 꺼내며 투덜거리자 어머니께서 웃으셨다. 1달 정도는 장난칠 거라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백화점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전 같으면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마저 불안해했을 거다. 어렵게 얻어낸 시간인만큼 자기 계발을 위해 써야 한다며 스스로를 자책했을 거다. 하지만 표현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는 관계만큼 좋은 해결책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정이나 상상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내 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우군에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최근의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며 한 순간에 180도 뒤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내 삶에 걸었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전의 내 모습이 잘못되었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삶을 유지시켜 온 원동력이다. 과거의 모습들을 잘못이라고 따지다 보면, 생활의 근간이 흔들린다. 나는 늘 최선이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비난하는 건 반칙이다. 변화는 실패했던 지난 날을 감싸안으며, 그럼에도 실패할 이 시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언제까지 "큰 형님-" 이라며 장난스레 부를 수는 없다. 어머니와의 점심 기행도 취업하게 되는 순간 잠정적으로 끝나게 될 거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표현해볼 수 있어서. 예의에 어긋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서열의 금기를 우스꽝스러운 표현으로 바꾸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우연히 갖게 된 어머니와의 정기적인 점심시간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어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며 점차 내 역할을 늘려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중요한 역할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거다. 때로는 아버지의 편에, 때로는 어머니의 편에 서서 서로의 입장을 느껴볼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께서도 표현에 서툴다. 두 분도 속에 담아두었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감정을 터뜨리곤 하신다. 어쩜 이렇게 판박이일까. 떠들썩했던 어제의 외출을 생각하며, 두 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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