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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10. 2019

잠시 에어컨을 꺼도 괜찮을까요?

나는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다. 자연스레 온도가 높게 치솟아도 야외활동을 곧잘 해낸다. 폭염이 나날이 이어졌던 작년 여름, 직장 행사에서 3만 보가 넘는 왕성환 활동량을 보이기도 했다. 더위에 강한 모습은 겨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변한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에는 이른, 가을부터 시름시름 앓는다. 당차던 걸음은 건전지가 떨어져 가는 장난감처럼 삐걱거리기 일쑤이다.


이런 나에게 에어컨은 종종 괴로움을 준다. 더위가 극심한 날에는 보약과 다름없다. 일상쾌적하게 만드는 보배이니까. 그러나 보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 일정 시간 이상 에어컨 바람을 쐬다 보면, 혹한기에 경계 근무를 서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근무가 끝날 때까지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에어컨을 자주 접하는 곳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학생에게는 학교가 될 수 있고, 직장인에게는 회사가 될 수 있다. 혹은 가정이거나 대중교통일 수도 있다. 대체로 자의에 의해 조절하거나 노출되지 않을 수 있지만, 직장의 경우에는 달랐다. 상하 체계가 있는 직장에서 직원 한 명의 의견은 에어컨 작동 유무에 반영되기 어려웠다.


이전에 근무했던 직장에서는 20명의 직원이 한 사무실을 사용했다. 직원 5명이 배치된 공간을 기준으로 천정형 에어컨이 1대씩 설치되어 있었다. 부장님은 에어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셨다. 본인이 더우면 "에어컨 키세요"라고 말했고, 본인이 추우면 "에어컨 끄세요"라고 말했다.  


부장님이 안 계실 때는 팀 내에서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더위를 타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여름에는 출근하면서부터 찡그린 얼굴들이었으니까.  책상에는 각 자가 휴대용 선풍기를 비치하고 있었고,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말은 "에어컨 언제 틀어?"였다.


부장님 또한 더위를 많이 탔으므로, 나로서는 줄곧 옷을 껴입을 수밖에 없었다. 의자 뒤에는 바람막이와 가디건이 유니폼처럼 걸려 있었다. 입어도 해결되지 않을 때에는 이따금씩 외부를 걷다가 돌아왔다. 에어컨 사용이 심한 날에는 뙤약볕조차 봄햇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번씩은 "추우니까 잠깐 에어컨 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묻고라도 싶었다. 하지만 나만 추워 보인다는 이유로 침묵을 고수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평온해진 동료들과 달리, 내 마음은 여름 한낮의 땅처럼 뜨거웠다. 밤이 되면 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듯, 퇴근할 때면 스스로를 다독였다. 단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가야 한다고.

 


"잠시 에어컨 꺼도 괜찮을까요?"


왜 이 말을 꺼내지 못했을까. 무엇을 위해 감기에 걸리면서까지 주저했을까. 에어컨을 끄자고 이야기했을 때 동료들이 나에게 실망하지는 않을까, 유별나다고 보는 건 아닐까 미리 넘겨짚었다. 동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지만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닐까' 상상하며 표현을 제한하고 통제했다.


관계에서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집에 짜장면을 주문할 때 "단무지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듯,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생각이나 감정을 서로에게 묻고, 알려줘야 한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황마다 마음속으로 느끼고 인식한 것을 진실되게 이야기할 때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갈 수 있다.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깨달았다. 물어보거나, 알려줬어야 했다. 에어컨을 잠시 꺼도 되는지, 혹은 나는 지금 춥다는 걸 말했어야 됐다. 친한 동료들이라고 여기면서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다가오는 그들을 외면하고 뒤로 물어선 꼴이 되었다.


관계는 서로에게 조율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나'와 '너'는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생긴 모습도 다르지만 묻고 알려줌으로써 맞춰갈 수 있다. 조율한다고 해서 '나' 또는 '너'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 합주를 떠올려보자. 각 악기마다 맡는 파트가 따로 존재한다. 본연의 소리가 있다. 피아노가 기타나 드럼의 소리를 대신 내줄 수 없다. 서로가 진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 마음으로 느끼는 소리를 낼 수 있다. 하모니가 된다. 다른 악기를 의식하며 흉내 내거나, 나만 생각하여 개성이 강한 소리를 고수한다면 합주는 완성되지 못한다.


'나'와 '너'는 애초에 다른 존재이다. 묻지 않으면, 혹은 알리지 않으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단 한 번도 춥다거나, 에어컨을 끄자고 제안하지 않았으면서 동료들을 탓하는 건 반칙이다. 적어도 동료들은 "덥다" 라며 자신들의 소리를 냈다. 옷을 껴 입고도 추위가 가시지 않을 때, "잠시 에어컨을 꺼도 괜찮을까요?"라고 마음의 소리를 내며 다가섰다면 폭염보다 더한, 체온처럼 뜨거운 우정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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