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들과의 놀이는 나에게 희망이었다

by 두근거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3년을 근무한 시점이었다.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은 막막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분야로 이직하자니 삶은 결코 나아질 것 같지 않았고, 새로운 분야를 알아보자니 적지 않은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는 그간의 경력을 인정받으면서도 적성에 맞는 또 다른 보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사회복지 경력과 서른을 넘긴 나이밖에 없었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보기는 문제지에 모두 나와있는 듯했다.


"형, 상담 쪽 일을 해보는 건 어때?" 군대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온 동생은 말했다. "상담 쪽?"이라고 되묻는 나에게 "형은 다른 건 몰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잘 들어줄 것 같아" 라며 추천한 이유를 덧붙였다. 상담사는 그간 생각하지 않았던 진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상담사란 돈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생각이 맞다면 일찍이 취업하여 돈을 모으고 싶었던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크게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세히 찾아볼까?' 생각이 든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삶의 변화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찾아본 바에 따르면 내가 이해한 바가 대부분 맞았다. 상담사가 되기 위해서는 깊고 다양한 공부와 일정 기간 동안 강도 높은 수련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대학원 진학이 필수에 가까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비나 수련비 같은 비용이 어마무시하게 발생한다는 후기를 보았다. 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돼있던 내게 상담사가 되어간다는 건 가까스로 인내한 시간을 소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정보를 계속 찾아보던 중에 특수대학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수대학원은 강의가 대부분 야간에 개설되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 또한 주간 근무를 마치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상담사가 되겠다고 더 바빠질 모습을 상상하니 숨부터 막혔다. 낮에 일을 하고 저녁에 대학원을 다닌다니.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우산을 챙겨 가라는 엄마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외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비싼 학비를 지출해야 할 상황을 생각하면 호흡은 더욱 짧아졌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생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보기였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해에 바로 원서를 썼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상담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론 몇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원했던 두 곳에 모두 합격했고, 면접 때 받았던 좋은 느낌을 따라 한 대학원을 선택했다. 학기 등록을 마치자 회사에 다니며 공부하겠다는 마음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누군가 "너 요즘 뭐해?' 물어봐도 "대학원 다녀"라고 대답하면 그럴싸해 보일 것 같았다. '장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처럼 이해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결국 일을 그만두는 대신에 상담사가 되는 과정에 몰두하자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상담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졸업을 하면 상담사가 되어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만큼 퇴사하는 것이 간절했고, 대학원은 적절한 핑곗거리로써 나와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봄날의 햇살이 얼굴부터 마음까지 서서히 감싸 안을 때처럼 포근한 생활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대학원이라는 보기를 골랐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이미 그만두었고, 앞으로의 시간을 공부에 전념하며 보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은 비구름이 사라지지 않는 장마 한가운데 같았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위축되는 것을 경험했다. 특수대학원에 다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그중에서는 전문직이라고 느껴지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면 누리게 될 안정적인 삶을 기대하며 직원이라는 신분을 내던졌다. 그러나 직업을 포기하고 마주하게 된, 대학원생이라기보다는 백수에 가까운 신분은 "너 요즘 뭐해?라고 물어보는 사람들 앞에서 예상과 달리 주눅 들게 만들었다. 대학원 선배들에게 들어보니 대학원을 졸업한다고 해서 그럴싸한 회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담 분야도 사회복지 분야만큼 포화상태였다. 또한 대학원생으로 살아갈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이 나를 가만히 기다려줄리는 만무했다. 나이는 들어가고, 경력의 공백이 늘어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나를 마음속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지위는 내면에서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상대적으로 부족하게만 여겨지는 나의 모습이나 지위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러한 절망감은 사람들과 만났을 때에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나와 상대방의 조건을 저울질하며 비교했다. 대부분은 타인의 근사한 직업과 내세울 것 없는 나의 직업이 저울에 달리는 추가되었다. 특수대학원생으로서의 생활에 집중하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아도 직업을 갖지 않으면 타인과의 비교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달려 나가지만, 그들과 다르게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상황은 절망감을 넘어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타인에게는 손가락질 한 번 해 본 적 없었으면서 나 자신에게는 쉴 새 없이 삿대질을 하는 우울한 시간이 이어졌다.


곧은 어깨를 굽게 만들며, 앞을 내다보는 일보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일이 잦아지면 절망감이 무르익었다는 의미였다. 어깨를 펼 만큼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오늘이나 내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제를 탓하는 시간이 그만큼 쌓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카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우준이와 서준이는 세 살이 되던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누나와 매형은 맞벌이를 했고, 엄마 혼자서 하루 종일 쌍둥이 조카를 돌봐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씩 엄마를 도와 조카들을 돌보고는 했다. 조카들을 만났을 때나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시간을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준이와 서준이에게는 나의 직업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카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마음으로 다가올 때면, 직업과 같은 조건이 진실한 관계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우리 뭐하고 놀지?" 다섯 살이 된 우준이와 서준이는 나에게 묻고는 했다. 대부분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놀이를 몸으로 먼저 시작하는 편이었지만, 가끔은 나에게 어떤 놀이가 하고 싶은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정답을 외치듯 숨바꼭질을 하자고 대답했다. 술래가 되어 조카들을 찾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감쪽 같이 숨은 거라고 믿던 그들의 실력은 발가락을 통해 주로 드러났다. 우준이와 서준이의 저돌적인 공격에 "으으윽" 하며 수시로 쓰러져야 하는 놀이보다 "우준이, 서준이 어디에 숨었지?" 하며 그들이 숨은 주변을 맴도는 것이, 이윽고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아무래도 좋았다.


돌이켜보면 희망은 나에게 외면하고 싶었던 절망과 마주하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 절망감을 보다 분명하게 느끼도록 하며 절망감에 빠져있는 나를 알아차리게 도와주었다. 그때의 나에게 있어 희망은 조카들과의 놀이였다. 낙서하기나 보물찾기, 풍선 떨어트리지 않기 같은 놀이에 집중하다 보면 현실을 씻은 듯이 잊을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활동들이다. 조카들이 가진 천진난만함은 전염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은 마음으로 이내 스며들며, 지금 여기가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곳이라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했다. 사라진 월급과 높아 보이던 주변 사람들의 지위, 그들처럼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이어지던 자기혐오를 지긋이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조카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나는 조카들과 함께 굵은 땀을 쏟아내며 "삼촌, 재밌지?" 하며 묻는 것 같은 표정들에게 자연스럽게 말린 입꼬리를 보여주며 대답을 대신했다.


조카들과 어울리고 집으로 돌아오려 할 때면 누나는 조카들과 놀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어른이고 조카들은 어린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카들과 쌓은 추억들을 회상해보면 내가 놀아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놀이를 할 때면 관계의 조건은 같아진다. 삼촌이라고 해서 놀이를 선점하거나 결정할 권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카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놀이만 무작정 요구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제안과 토의, 양보와 선택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우리만의 방식과 규칙을 만들어갔다. 삼촌인 나는 대부분 그들에게 양보하는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의견을 얘기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갖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럴싸한 이유 말고도 무엇보다 함께 놀았던 내가 즐거웠기에 놀아줬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절망감이 커질수록 희망이란 존재는 희미하게 변한다. 절망감에 빠져들수록 자기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는 순간은 희망을 경험하게 하고, 절망에 절여진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구름에 가리고, 비로 사라진 뒤에 맞이하는 햇빛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내 삶에 찾아온 절망감이라는 장마를 견딜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조카들과 흘린 땀방울이었다.


"오, 사, 삼, 이, 일, 땡. 이제 찾는다"

발가락이 삐쭉 튀어나온 커튼 옆을 지나며 말한다.

"오잉, 우준이 서준이가 집 밖에 나갔나?"

나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누군가는 말한다.

"따끼,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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