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컵에서도, 호박꽃은 피었다

풍족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by 멈춤의 일기장

지난 초겨울, 아들의 지인에게서 늙은 호박을 하나 받았다.
호박을 손질하다 보니 씨앗을 버리기가 아까워 신문지 위에 골고루 펼쳐 말려 두었다. 심심할 때 까먹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봄기운이 스미기 시작하자 문득 생각이 났다.

고층이어서 햇빛이 부족해 대부분의 식물이 웃자라기만 하는데,
‘저 씨앗을 심으면… 자랄 수 있을까?’


그야말로 호기심이었다.
반신반의하며 화분도 아닌, 카페에서 받아 온 플라스틱 컵에 씨앗 두세 알을 넣고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저 물을 주고, 지나가다 한 번 들여다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싹이 올라왔다.
나는 가족들을 불러 자랑했고, 모두 박수를 치며 재미있어했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집 안에 웃음이 잠시 머물렀다.


그날부터였다.
나의 작은 화단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어요.
정말 호박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그렇게 느껴졌다.
내게는 그 작은 컵 하나가 하루의 재미가 되고, 매일 들여다보게 되는 호기심이 되었다.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뒤따랐다.
‘저 호박이 넝쿨을 지며… 정말 자랄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매일 그 작은 컵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녀린 줄기가 시작되었고, 작은 봉오리가 맺히더니 그것이 자라 호박꽃 봉오리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가슴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꽃이… 필까?’


그리고 오늘 아침.
햇살 좋은 창가에서, 노랗게 꽃이 피어 있었다.


장미보다도 아름답고,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지금의 호박꽃만큼 예쁘지는 않으리라.
내 마음속에 이미 작디작은 호박이 열린 기분이었다.


풍족한 흙도 아니고, 플라스틱 컵 속이었다.
그런데도 씨앗은 피어나 줄기가 되고, 결국 꽃이 되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살아간다는 건 이런 거구나.’
딱 그만큼만, 마음이 조용히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열매가 맺힐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나는 천천히 물을 주고, 조금 더 정성껏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빌려, 나도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해보려 한다.

카페에서 받아 온 플라스틱 컵 속에서도 이렇게 귀한 생명이 자라는데,
나도 내 자리에서 무언가를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내 창가에 꽃이 하나 피었다.
당신의 하루에는… 어떤 작은 싹이 올라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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