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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단체, 큰 마음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작은 손길, 큰 울림> 시리즈 6 (8)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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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화면 속에서 만난 하루


2021년 초, 코로나는 여전히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기보다, 작은 화면 너머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일상은 멈춘 듯 보였지만, 누군가는 그 멈춤 속에서 더 간절히 하루를 붙잡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캘거리에 위치한 작은 비영리 단체에서 6개월간 온라인 봉사를 시작했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화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삶 가까이로 들어갔다.


온라인 회의 첫날, 처음 접속한 한 어르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오늘도 뉴스레터 올려주시나요? 그걸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짧은 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머물렀다. 작은 화면 너머에서 건네진 인사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시작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제야 또렷이 실감했다.



작은 뉴스레터 한 장이 만든 변화


내 역할은 한국어로 흩어져 있던 정보를 영어로 정리해 커뮤니티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매주 화요일, 뉴스레터는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발행되었다. 입국 규정, 백신 예약, 비자 신청, 연금과 각종 경제 지원 제도까지—그 시절의 정보는 누군가에게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안전’이자 ‘희망’ 이었다.


어느 날 뉴스레터 발송 후, 한 어르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덕분에 필요한 지원을 신청했습니다. 혼자였으면 결단코 못 했을 겁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키보드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잠시 멈췄다. 작은 글 한 장이 누군가의 삶을 실제로 붙잡아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천천히, 그러나 깊게 마음속으로 내려앉았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의 하루는 점점 더 고립되었다. 외출은 두려웠고, 하루 종일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잦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전화 한 통, 화면 너머로 오가는 짧은 대화조차 그분들에겐 큰 의미가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도우려 한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조금 덜 외롭고, 덜 무서웠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오래 빌었다.



작은 안내가 붙잡아 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2021년 봄, 코로나 상황은 시시각각 달라졌고 한국 방문 절차 역시 거의 매주 변경되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전화가 울렸고, 캘거리와 토론토의 시차 때문에 늦은 밤까지 상담이 이어지는 날도 적지 않았다.


“이 서류로 충분할까요?” “격리 규정이 또 바뀌었다던데, 사실인가요?”


나는 단순히 규정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전화 너머에는 오래 기다린 귀국의 마음, 떨리는 재회의 약속, 놓칠 수 없는 사연이 함께 있었다.


특히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이용자의 마지막 말이 있다.


“선생님 덕분에… 이제 갈 수 있습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망을 붙잡아 드리는 일이었다는 것을. 작은 안내와 그 뒤에 이어진 관심과 기다림이, 어떤 이에게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었다.



작은 단체가 움직이는 진짜 방식


단체는 정부 보조금과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사업계획서와 보고서, 후원 요청서 작성이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곧 알게 되었다.


이것은 형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내일에도 존재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작은 단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간과 손길, 기록과 책임이 필요했다. 커뮤니티가 우연히 유지되는 순간은 없었다. 매주 반복되는 회의, 문서 작성, 후원 요청,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배려 하나하나가 단체의 지속성을 만들어갔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배웠다. 작은 단체의 힘은 규모가 아니라, 꾸준함과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돌아보며: 작은 것이 만드는 큰 울림


상담을 마친 뒤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던 짧은 한마디들은 단순한 감사 인사를 넘어섰다.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말들은 내가 하고 있던 역할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확인과 믿음의 신호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거창한 도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매일의 작고 꾸준한 손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분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작은 화면 속에서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와 희망, 그리고 마음의 안전망을 함께 엮어오고 있었다.


작은 단체, 작은 뉴스레터, 작은 안내 한 장.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히 사람과 사람을 잇는 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오늘도 나는 믿는다. 작은 손길은 결국 큰 울림을 만든다는 것을. 화면 속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일이,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 덜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세상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어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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