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작은 손길, 큰 울림> 시리즈 6 (9)
작은 동행에서 시작된 질문
캐나다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만난 이민자들의 얼굴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민 성공 신화’ 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어가 막히는 순간, 제도는 곧 장벽이 되었다. 병원 예약 안내문 하나, 간단한 검진 요청서 한 장 앞에서도 오래 머뭇거려야 했다. 특히 오래전에 이민 온 어르신들에게 캐나다의 행정 시스템은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세계였다.
늦가을 어느 오후, 단체 복도 한쪽에서 70대 어르신 한 분이 구겨진 병원 안내문을 들고 서 있었다. 몇 번이고 접었다 펼친 종이 위에는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만 남아 있었고, 어르신의 얼굴에는 공포와 체념이 동시에 비쳐 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도움이기만 한 걸까.’
생명을 건너는 길에서, 함께 서 있던 사람
그 질문은 대장암 검진을 앞두고 막막해하던 한 어르신을 만나며 분명해졌다. 검진 통보를 받았지만, 복잡한 절차와 설명서, 그리고 ‘혹시’라는 두려움 앞에서 어르신은 검진 자체를 포기하려 했다.
나는 단지 서류를 읽어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예약 단계부터 진단, 수술 전후 절차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계획하며 옆에 앉았다. 의료진과의 대화에서는 어르신의 질문을 대신 정리했고, 결정의 순간마다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다.
몇 달에 걸친 이 동행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봉사자가 아니라, 그분이 생명과 직결된 선택을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 같은 존재’ 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수술이 끝난 날, 병실에서 어르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무서워서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무게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동행’이라는 단어는 내 삶의 방향이 되었다.
서류 한 장이 삶을 다시 세울 때
동행은 때로 생명을 넘어, 삶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남편을 잃고 두 자녀를 홀로 키우던 59세 여성은 캐나다의 사회보장 제도 앞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였다. 받을 수 있는 미망인 생계 보조와 주거 지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서류를 펼쳤다. 복잡한 양식을 하나씩 채워가며, 그녀의 남은 삶을 다시 그려 나갔다. 서류 한 줄이 채워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수당 승인 소식을 들은 날, 그녀는 말없이 울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건 단순한 행정 지원이 아니라, 삶을 다시 붙잡게 하는 안내라는 것을.
제도가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일
매년 돌아오는 세금 신고 시즌은 많은 어르신들에게 가장 큰 불안이었다. 숫자보다 두려운 것은 ‘혹시 잘못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이분들의 세금 신고를 도우며, 단순히 숫자를 입력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그 속도에 맞춰 함께 진행했다. 이 작은 동행 하나가 경제적 불안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밀려나 있다는 감각까지 덜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의 핵심은 제도가 아니라, 제도에 닿지 못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청년들의 불안을 함께 건너다
동행은 어르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토론토 청년 모임에서 만난 이민 청년들은 언어는 유창했지만, 미래 앞에서는 누구보다 불안해 보였다.
비자와 영주권 문제로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하던 한 청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해결책보다 먼저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함께 작은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다시 깨달았다. 해답이 없어도, 아는 이 하나 없는 땅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가장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다.
가장 깊은 동행, 집과 마음을 열다
어느 날, 갈 곳을 잃은 한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족과의 갈등으로 집을 나왔고, 머물 곳이 없다는 말에 나는 한참 망설였다.
그러나 결정을 내렸다. 우리 집의 문을 열었다. 4박 5일 동안 함께 울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뒤 미국에 있던 그녀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어머니 곁에 있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알았다. 집을 내어주는 일은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세상에 연결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도움을 넘어, 계속 걷는 사람으로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해결해 주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속도에 맞춰, 필요한 순간에 곁에 서 주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으니, 누군가의 이야기에 끝까지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살자.
도움은 순간이지만, 동행은 삶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길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