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작은 손길, 큰 울림> 시리즈 6 (10)
길 위에 서 있던 시간
20여 년 전 캐나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땅에서, 손에 쥔 지도와 버스 노선표는 하루를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도구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보다, 오늘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낯설고 불안했던 시간들이 훗날 누군가의 길 앞에서 멈춰 서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민자의 삶, 언제나 이동 중
이민자의 삶은 언제나 이동 중이다.
익숙했던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질서 속으로 몸을 들여놓는 일.
그 길은 종종 외롭고, 때로는 무심할 만큼 냉정하다.
하지만 나는 그 길 위에서 배웠다.
삶은 준비된 사람에게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걷는 사람에게 조금씩 얼굴을 내민다.
도움보다 관계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봉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돕는다’ 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도움은 선의처럼 느껴졌고, 역할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가진 거리감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도움은 때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말처럼 들렸고, 관계의 깊이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기 이전에, 각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온 존재들이었다.
언어 앞에서 멈춰 선 어르신, 제도 앞에서 방향을 잃은 청년,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낸 이민자 모두 자신만의 시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곁에 서며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봉사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이며,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
함께 멈추고, 함께 걷기
누군가의 삶에 스며드는 일은 거창하지 않았다.
앞서 나가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멈춰 설 때 함께 멈추고, 다시 걷고 싶을 때 나란히 발을 맞추는 일이었다.
말보다 침묵이 필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해결책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이 더 절실했던 시간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배웠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되찾는 순간,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존재와 태도
현장은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싶은가?
무엇을 가진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분명해졌다.
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기보다,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곁에 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제도를 설명하는 사람보다, 제도에 닿지 못해 주저앉은 마음을 먼저 살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연대
이민자의 삶은 종종 외로움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나는 그 외로움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서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 말없이 건네는 자리, 이름 없이 이어지는 연대.
작은 손길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울림은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깊다.
나는 그 울림의 한가운데서, 봉사는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일임을 배웠다.
곁을 지키는 다짐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선택 앞에서 물러서는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서 남아 있는 사람인지를 현장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그 답은 단순했다.
사람이 먼저라는 믿음, 그리고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기로 했다.
빠르지 않아도 좋으니, 누군가의 속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필요한 순간 곁을 비워두지 않는 사람으로
도움을 주는 위치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함께 걷는 사람으로
다시 길 위에 서서
이 시리즈의 끝에서 나는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여전히 정답은 없고, 배울 것이 많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삶의 가장자리에 선 이들과 시선을 나누고 그들의 방향을 존중하며 끝까지 동행하는 일이라는 것.
시리즈 6에서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 작은 손길, 큰 울림” 으로 복지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동행을 기록했다면,
다음 시리즈에서는 그 길이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일상의 자리로 시선을 옮겨보려 한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늘 같은 방향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며, 나란히 서는 법을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
이 시리즈는 특별한 성공담이나 감동적인 교훈을 담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낯선 땅 캐나다에서 부부로 살아가며 겪는 소소한 하루들,
그 안에서 조용히 쌓여온 신뢰와 연대의 기록을 담고자 한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안식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