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소주

by 이진무

하늘이 어둡고 바람이 차갑게 부는 걸 보니

곧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눈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옛날 시골 툇마루에 앉아

친구와 술을 마시던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술잔 위로 하얀 눈송이가 날아와 앉던 순간만큼은

또렷합니다.


부딪치는 술잔 속에 눈이 내려앉는 걸 보고

우리는 ‘겨울 소주’라고 기뻐 소리쳤습니다.


겨울 소주는 눈처럼 차가웠지만,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들어와

활활 타올랐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차가움과 뜨거움,

서로 이질적인 것이 만나

심장을 뛰게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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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휴학계를 냈습니다. 건강 때문에 오래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늘 붙어 다니던 그가 사라지니 세상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나는 크게 마음을 먹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주 먼 곳에 있었습니다. 해남, 땅끝마을.

이름처럼 정말 세상 끝 같은 곳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눈보다 더 하얬습니다.

나는 아픈 그에게 슬픈 눈을 보이기 싫어 자꾸 먼 곳만 바라봤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툇마루로 나갔습니다.

손에는 소주 한 병과 김치 한 접시가 들려 있었습니다.

“마시자.”


걱정되어 말렸지만,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찾아왔는데, 당장 죽더라도 취해야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아련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했는지.

지금은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옛날 어딘가에 묻혀 있습니다.

소주잔에 담겨 녹아내리던 하얀 눈송이처럼,

그냥 소주 속에 녹아 사라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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