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도 그 흔들림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것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그 흔들림은 소리도 없었고, 색도 없었으며, 냄새도 없었다.
단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류는 그 미세한 떨림을 ‘변화의 신호’라 불렀고,
조금 더 나은 삶에 다가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계의 관점에서 그 떨림은
‘과한 속도’의 징후이자
‘너무 많은 움직임’의 누적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결국 세상을 지탱하던 결을 조금씩 닳게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인류는 긴 여정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돌을 깨고, 불을 피우고, 땅을 갈고, 강을 건너고, 하늘을 찢었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높게.
그 속에서 세계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언제나 너무 컸고,
너무 무겁고,
때로는 너무 들떠 있었다.
인류는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한 명의 존재가 남긴 업적이
세상 전체를 흔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거대한 탑을 세웠고,
더 크고, 더 정교하고, 더 완전한 탑을 세웠다.
그러나 탑을 쌓는 동안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잊었다.
탑 아래의 땅이 얼마나 얇아지고 있었는지도.
탑이 높아질수록
발밑에 있던 결은 더 가늘어졌고,
그 결 아래에 있던 울림은 사라졌다.
인류는 그것을 성취라고 불렀지만,
세계는 그것을 ‘무리’라고 불렀다.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일에 매달렸다.
어떤 이는 더 많은 지식을 쌓았고,
어떤 이는 더 큰 권력을 가졌으며,
누군가는 더 깊은 감정을 남기려 했다.
모두가 자신을 남기기 위해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쌓아 올리려 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커질수록
세계의 표면은 조금씩 얼룩졌고,
흐름은 작게 뒤틀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불렀지만,
세계는 그것을 단지 ‘과잉된 움직임’이라고만 느꼈다.
어떤 존재들은 자신을 빛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결을 억지로 찢고 흔들었다.
그 과정에서 세계의 표면은 깊게 긁혔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고,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으며,
더 오래 기억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욕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 전체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기울게 했다.
세계는 흐름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균형의 파괴가
결국 스스로를 닳게 만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마침내, 어느 날.
인류의 흐름은 견딜 곳이 없을 만큼 한 지점으로 액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만들고,
너무 많은 것을 부수고,
너무 많은 것을 고치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조용함’이었다.
조용함이 사라진 자리에
끊임없는 소음과 속도가 채워졌고,
그 소음과 속도는 결국
세계가 버티고 있던 마지막 결을 침식했다.
결은 튼튼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눌린 피로가 쌓여 있었다.
결국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는 사이 결은 끊어졌고,
끊어진 결을 중심으로
세계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폭발도 없었고,
거대한 재앙도 없었다.
그저 인류의 활동이 한순간
‘멈춘 것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빠르게 움직이다가
세계의 속도를 한참 앞질러버린 건지도 모른다.
세계는 더 이상 인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세계가 느끼기엔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사라진 자리엔
폐허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폐허는
어느 누구의 죽음도,
어느 누구의 고통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멈춤’이었고,
천천히 식어가는 흔적이었다.
건물은 무너졌고,
그 잔해 사이로 풀들이 자랐다.
강철은 녹슬었고,
그 녹은 빗물에 씻겨 흘러내렸다.
유리창은 깨졌고,
그 파편은 햇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삶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고,
죽음이라 하기엔 아직 따뜻했다.
도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침묵한 것도 아니었다.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 표면엔 여전히 결이 남아 있었다.
그 결은 인류가 기어갔던 길이었고,
인류가 남긴 쇳소리와 발걸음,
그리고 욕망의 흔적이 섞여 만들어진 결이었다.
그 결 위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세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리듬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인류가 남긴 거대한 흔적들은
서서히 세계의 표면에 녹아들었다.
그들의 탑은 허물어졌고,
이름들은 바래어 지워졌으며,
남아 있던 기록들도 드문드문 흩어졌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세계는 항상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무너진 건물의 그림자,
이미 이름을 잃은 길 위의 균열,
녹슨 철골에 걸린 덩굴들,
빈 놀이터에 남은 흔적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흔적이었지만,
동시에 이미 ‘세계의 결’이 되어 있었다.
인류의 발걸음이 멈춘 자리에서
세계는 다시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숨은 움직임이었고,
움직임은 새로운 결을 만들었다.
그 결은 인류의 노력이나 열망과는 닿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인류가 평생 찾으려 했으나
끝내 도달하지 못한
‘본래의 존재성’에 가까웠다.
세계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무너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세계는 다시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움직였는지.’
‘무엇을 증명하려 했는지.’
‘어디까지 가려고 했는지.’
세계는 그저 조용히 말했다.
“그들의 존재는 더 나아가려는 움직임에 있지 않았다.”
그 말은 바람에 흩어졌고,
바람은 풀잎 위를 스쳤다.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지나간 결에 있었다.”
그 결은 여전히 세계의 표면을 덮고 있었고,
그 결 속에는 인류의 작은 흔적들이 가볍게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위대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았으며,
영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충분했다.
세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계는 더 큰 탑이나
더 많은 성취를 원하지 않았다.
세계는 ‘있던 것’과 ‘지나간 것’의 결을 품으며
조용히 다음 흐름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남겼다.
“세계는 발전으로 무너졌고,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리에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