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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균열

by 박세신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인간의 불행을 먹으며 살아왔다.
인간들이 떨구는 눈물, 짓누르는 고통,
숨을 끊기 직전에 흘러나오는 절망의 향기—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영양이자 쾌락이었다.


세상의 흐름은 늘 같았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잃고,

어떤 사람은 돈을 잃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잃는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말한다.
“괜찮아.”
“나는 아직 버틸 수 있어.”
“사람들은 다 이 정도는….”


그런 말들은 언제나 공허했다.
겉에서는 괜찮다고 말해도
속에서는 검은 파동이 끓어오른다.


그 뜨겁고도 차가운 모순의 향기가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세상이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불행의 냄새가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향기를 자르는 듯한 느낌.


처음엔 세상의 구조가 변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불행은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섞인 어떤 미세한 향기가
내 혀를 알레르기처럼 찌르기 시작했다.


그 한 끗이 무엇인지 찾는 데
나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 간직한 그 미세한 잔향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감사.


나에게는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감정.
악마가 먹지 못하는 유일한 감정.
심지어 그 향기를 맡으면
내 몸은 신경을 찌르듯 떨렸고,
혀끝은 타는 듯 메말라갔다.


나는 불행을 집어삼키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매 순간 증명해왔는데,


감사는…
그 불행 안에서 작은 돌멩이처럼 끼어
모든 균형을 무너뜨렸다.


내 혀는 그 조그만 조각만으로도
제 맛을 잃었다.


그것이 균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인간 세 가지의 상황에서 더욱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먹지 못하는 불행’을 마주했다.



응급실 앞에는 늘 피 냄새와
절망의 잔향이 뒤섞여 있었다.


내게는 익숙한 장소.
불행이 어딘가에서 터지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발걸음이 향한다.


그날도 그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가운데,
나는 어떤 한 여자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숨은 얇았다.
얼굴의 핏기가 거의 사라진 채
입술만 파랗게 남아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녀는 이미 세상의 반쯤을 잃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의사가 고개를 숙여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그녀의 몸에서 불행이 폭발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찢어지는 비탄의 향기가

내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며
짜릿하게 퍼졌다.


바로 그때였다.

간호사 한 명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부디… 힘내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여자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고마워요.”


그 두 글자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혀가 마치 얼음물에 꽂힌 듯 얼어붙었다.


그녀의 불행은
너무도 완벽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고통은
내가 언제나 가장 진하게 맛보던 향기였다.


그러나 그 안에 감사가 섞였다.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흠집처럼.


하지만 그 작은 조각이
불행의 깊은 향을 흐트러뜨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게 쉬지 못했다.


감사는 불행의 반대가 아니었다.
감사는—
불행을 껴안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남긴
희미한 인간성의 잔불이었다.


먹으려 할수록 역겨움이 올라왔다.
나는 처음으로
불행을 ‘삼키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여자를 떠나며
내 내부 어딘가는 분명히 금이 갔다.



며칠 뒤,
나는 또 다른 냄새를 맡았다.


불행은 익숙했다.
그러나 이번엔
희미한 따뜻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냄새를 따라
한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말기 환자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숨은 거의 들리지 않고,
시간은 고요하게 균열났다.


나는 천천히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어디선가
불행의 냄새가 짙어지는 순간,
한 여자의 침대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거의 죽어 있었다.
근육은 힘을 잃었고,
눈동자는 흐릿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저편으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병인이 다가와
살며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이불… 따뜻하네요.
고마워요.”


그 한마디는
누군가의 삶의 끝에서 태어난
가느다란 불꽃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내게 치명적인 독과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불행을 들이마시려 했다.


수십 년의 고통,
수많은 상실,
마지막을 기다리는 허무.


그 모든 것이
향기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
이물감이 조용히 섞여있었다.


그 미세한 따뜻함이
내 혀끝을 베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감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했다.


감사는 기쁨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고백’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 불행을 먹을 수 없었다.


세 번째 균열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나는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하얀 이불을 덮은 노인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렸고,
그 떨림 아래
수십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는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는 지금 완벽한 불행의 중심에 있었다.

외로움, 상실감, 죄책감, 두려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향기.

나는 그것을 먹기 위해 다가갔다.


그 순간,
노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그의 아내에게 건내는 말이었다.


그 말은
불행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난
말도 안 되는 꽃이었다.


그리고 그 꽃은
내게는 독이었다.


나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내 가슴에서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먹어야 하는데
먹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알레르기가 아니었다.

이건—
내 존재 그 자체를 공격하는
균열이었다.


'왜 그동안은 몰랐을까?'


나는 길 위에 멈춰 섰다.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느리게 불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의 욕망, 고통, 상처, 절망.
그 모든 것이 내 먹이였고, 나의 세계였다.


하지만
‘감사’라는 감정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불행 속에서도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의 손길을 붙잡았다.


절망 속에서도
미약한 온기를 잃지 않았다.


감사는
불행의 반대가 아니었다.


감사는—
불행을 견디는 힘이었다.


감사는
불행이 완성될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균열이었다.


나는 그 균열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먹을 수 없는 감정 앞에서
무력했다.


그날 이후로
내 세계는 흔들렸다.


불행을 먹기 위해 다가설 때마다
감사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망 속에서도,
숨이 끊어져가는 환자의 고독 속에서도,
반려를 잃은 노인의 공허 속에서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감사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에 기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누군가의 손을 붙잡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먹으려던 불행은
완전한 불행이 아니었다.


‘감사’라는 균열이
그 안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이
내 존재의 내부까지
서서히 침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부서지고 있었다.


불행만으로는
더 이상
내 존재를 유지할 수 없었다.


나는 균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인간의 불행을 먹는 존재인 나는
인간의 감사 때문에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존재의 균열을 느꼈다.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균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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