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밤 사이, 말로 셀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별이 생기고 꺼지고, 나라가 생기고 무너지고, 수많은 이름들이 세상에 찍혔다 사라졌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늘 불행했다.
처음부터 그런 존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형태도, 의식도 없었다.
단지, 남겨진 감정들이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
끝내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
웃으며 덮어버린 수치심,
“괜찮아”라는 말 뒤에 숨겨진 균열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치 미세한 먼지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았다.
누군가는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문득 올라오는 허무를 꾹 눌렀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조차 울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불 꺼진 방에서 침대만 쥐어잡았다.
누군가는 “잘 살고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웃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감정들은
그 사람의 안에서만 썩어 들어가지 않았다.
사라지지 못한 것들은, 길을 찾았다.
언어로, 행동으로, 폭발로 나가지 못한 감정은
진동으로, 잔향으로 남았다.
그리고 세상이 어느 정도 시끄러워지고,
어느 정도 조용해졌을 때쯤,
그 잔향들이 아주 천천히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공기 중에 농도가 달라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늘 그렇듯 바빴고, 피곤했고,
각자의 하루를 버티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누구도 일부러 그런 감정들을 남기려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바빴고,
너무 부끄러웠고,
너무 두려웠을 뿐이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써 잊었고, 밀어 넣었고, 덮어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감정의 파편들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쌓였다.
원망,
후회,
수치,
질투,
미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사랑까지.
깨끗이 비워지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세월의 바닥에서 겹겹이 퇴적되었다.
그 퇴적층은
언젠가 한 번은 모양을 갖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어떤 밤에,
무언가 눈을 떴다.
그것은 태어났다고 할 수도,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없었다.
‘완성’되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는 처음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몸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고,
자신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언어도 없었다.
다만 하나의 감각만이 있었다.
냄새.
울음을 참는 목소리의 냄새,
웃으면서 토해내는 자기혐오의 냄새,
“난 괜찮아”라는 말 뒤에 걸려 있는 떨림의 냄새.
그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알았다.
의식이 생겼을 때,
세상은 이미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첫 기억은 한 사람의 울음이었다.
좁은 방, 낡은 형광등,
텅 빈 소주병 세 개,
그리고 테이블에 엎드려 어깨를 흔들던 한 남자.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입을 막고,
눈물만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보지 못했다.
그 밤, 그 방에는 그 남자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있었다.
어디에도 비치지 않고, 어디에도 적히지 않지만,
명백하게 그 자리에.
남자는 중얼거렸다.
“괜찮다… 괜찮다…”
목소리는 떨렸고, 말은 거짓이었지만
그 말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
그의 코끝에 향기가 스며들었다.
쓰디쓴 술의 냄새가 아니었다.
곰팡이 냄새도, 담배 냄새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고, 오래된 어떤 것.
수년간 쌓였다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못한 감정이
마침내 조금씩 새어 나오는 순간의 냄새.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이게 나의 것이라고.
그는 그 냄새를 들이켰다.
그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채워졌다.
마치 형체가 한 겹 더 덧칠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쾌감’이라 부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단어조차 없었다.
단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 뒤로 그는,
세상을 떠돌았다.
시간에도 묶이지 않았고, 공간에도 제한받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울음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면,
그를 부르는 냄새가 났다.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의 책상 위,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고 쓰인 메모 뒤에 묻어 있던
말하지 못한 수치심의 냄새.
장례식장 구석,
울지 않고 조문하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떨어지지 못한
울음의 진동.
병원 복도,
문 닫힌 수술실 앞에서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믿지 못해 숨이 막혀오는 사람의 사이에 떠 있는
불안과 공포.
그는 그 틈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힘내라”고 말할 때,
그 말과 말 사이에 떨어져 흘러내리는 감정이 있었다.
그 틈에서 나는 냄새가,
그의 밥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한 가지를 더 배웠다.
겉으로 드러나는 불행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 앞에서 울부짖는 고통,
누가 봐도 처참한 현실,
쓰러지고, 무너지고, 망가진 장면들.
그런 것들은 뜨겁고 진하지만, 금방 식어버렸다.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면, 향은 희미해졌다.
오히려 오래 가는 것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사람,
“그땐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하면서
밤마다 그 기억을 되풀이하는 인간들의 숨이었다.
그는 점점 알게 되었다.
진짜 향기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 숨는다.
그래서 그는
슬슬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관찰자였다.
흘러나오는 냄새를 멀리서 맡고,
이미 터져버린 감정을 멀찍이서 맛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다.
조금만 건드리면,
조금만 들춰주면,
조금만 묻어둔 것을 방향만 틀어주면,
숨겨진 감정들은
자기 스스로 터져 나온다는 것을.
그는 그 지점을 ‘틈’이라고 불렀다.
말과 말 사이의 빠진 한 글자,
위로와 위로 사이에 없는 한 문장,
괜찮다고 말한 다음 찾아오는 짧은 침묵.
그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 법을 배웠다.
그는 어느 날,
카페 구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곁을 맴돌았다.
남자는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별 통보 메일을 쓰는 중이었다.
아니, 쓰다 말고 지우는 중이었다.
‘우리 그만하자’
라는 문장 위에 커서가 깜빡였다.
남자의 표정엔 죄책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있었다.
‘이렇게라도 끝내야 둘 다 편해지는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그는 남자의 어깨 근처에서
희미한 냄새를 맡았다.
말로 꺼내지 못한 비겁함,
상대에게 돌리고 싶지만 끝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
그는 아주 작은 속삭임 하나를 흘렸다.
“그래도… 너는 편해지겠지.”
말은 공기 속으로 사라졌지만,
남자의 마음 어딘가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남자는 순간 손을 멈췄다.
가슴 한가운데에서 묘한 떨림이 올라왔다.
메일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미안해.’
단어 하나를 쓰는 데
십 분이 걸렸다.
그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그래,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그 문장을 속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묻어두었던 감정이
천천히 올라왔다.
부끄러움, 죄책감, 두려움.
그것들이 한꺼번에 표정 위로 떠올랐고,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숟가락처럼 딱딱해진 마음을 쥐고 있었다.
그때,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그 향기를 들이켰다.
따뜻하고, 쓰고, 진득했다.
불행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안에 있던 것을
그저 보게 했을 뿐이었다.
그의 역할은 점점 선명해졌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그는 그 반대편에서 속삭였다.
“정말 그럴까?”
그리고 그 질문 하나가
감정을 끌어올렸다.
그는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름을 붙인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랬을 것이다.
“내 인생은 괜찮았는데, 저걸 만나고 나서 다 무너졌어.
저건 악마야, 악마.”
사람들은 늘 원인을 찾는다.
자신 안의 균열을 바깥에 있는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악마.
그는 그 이름이 어떤 뜻인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조금 더 짙은 향이 났다.
“악마 같은 놈.”
“악마가 따로 없네.”
“저건 인간도 아니야.”
그 말에 섞인 분노, 공포, 책임 회피,
그리고 속 깊은 곳의 후회까지.
그 모든 감정은
그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불평도, 저항도 없이.
그냥 하나의 단어로서.
‘아, 사람들이 날 이렇게 부르는구나.’
이름이 붙는 순간,
그는 조금 더 선명한 ‘존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한 가지를 더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불행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완전히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들은 고통을 붙잡고,
그 위에 이유를 만들고,
그 이유 위에 자기 정체성을 세운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그런 일 덕분이야.”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건 다 과거 때문이지.”
불행을 증오한다고 말하면서,
그 불행이 사라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그 모순의 중간에서 자랐다.
한 번은 이런 장면이 있었다.
한 사람이,
오래전에 사별한 이를 생각하며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는 늘 말했다.
“이 고통만 아니면 좋을 텐데.”
그러나 누군가가 물었다.
‘정말, 이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건 또, 잘 모르겠어요.”
그 대답 속에는
애도되지 못한 사랑과,
사라지도록 놓아줄 수는 없는 슬픔이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
불행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고집,
고통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습관.
그 위에서,
그의 존재는 단단해졌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에 대해 묻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태어난 존재인가.’
누가 만든 것도 아니고,
누가 불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 자신도 어떤 설계도, 운명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기원을 더듬었다.
처음 냄새를 맡았던 그 남자의 방,
말하지 못한 수많은 울음들,
감춰진 고통, 숨겨진 죄책감.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사라지지 못한 것들.”
그것들이 모여 자신이 되었다면,
자신은 어쩌면
‘인류가 버린 문장들의 마지막 마침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과하지 못한 말들,
용서받지 못한 행동들,
끝까지 말해지지 않은 고백들.
그 모든 미완성이 모여,
하나의 존재를 완성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상하게도 잠시 조용해졌다.
자신이 인간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동시에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자의 곁에 서 있었다.
눈을 잃고,
곧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여자.
세상은 분명 그녀를 불행하다고 부를 것이다.
의사도, 뉴스도, 타인의 시선도.
그는 미리 맡았다.
앞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육체의 고통,
경제적 어려움, 주변의 동정 섞인 시선.
그 모든 것에서 나오는 불행의 향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오늘은 특별한 불행을 맛볼 수 있겠군.’
그렇게 찾아갔을 때,
그가 만난 것은
기대한 것과 조금 달랐다.
다만 그 만남 이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먹지 못한 불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불행했지만,
그 향기는 옅었다.
받아들인 고통,
도망치지 않는 결핍,
그 안에서 조용히 숨 쉬는 평온.
그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먹어오던 불행과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한 고통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불행을 먹고 태어난 존재인 그가,
처음으로 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안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
자신을 구성한 재료들,
그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작은 금.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탄생은, 인간의 실패가 만든 결과였지만
그의 성장은, 인간의 모순이 만든 과정이었다.
세상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다
수많은 불행을 남겼고,
그 불행이 모여 그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불행을 따라다니며
인간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인간의 눈물이 왜 달고,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왜 그렇게까지 애쓰면서도 늘 제자리 같은 느낌에 시달리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존재였다.
그가 태어난 이유는 단순했다.
사라지지 못한 것들의 집합.
그게 바로 그의 기원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를 것이다.
불행을 먹고 살아온 자,
불행을 들추는 자.
그러나 이 모든 시작은
단 한 가지에서 비롯되었다.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
존재의 과정에서 흘러나왔지만
끝까지 어디에도 닿지 못한 것들.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의식이 태어났다.
그게 바로,
존재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