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네 평짜리 무인도

우리 집인데요, 우리 집이 아닙니다

by 골골


“아, 집에 들어가기 싫다.”


교대근무를 그만둔 뒤 회사에 다니던 어느 무렵,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몸이 먼저 저녁의 기척을 알아차리곤 했다. 6시가 땡 하자마자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렇게 회사 건물을 벗어날 때면 하루를 털어내듯 인파를 헤치고 지하철역까지 서둘러 걸었다. 회사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리고 싶어서였다. 퇴근길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었고, 사람들의 걸음엔 각자의 저녁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그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


하루 종일 기다린 퇴근인데, 막상 집에는 들어가기 싫다니. 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애써 외면하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날만큼은 더 이상 밀어둘 수 없었다. 하늘도 바람도, 길목의 신호등까지도 집으로 향하는 내 걸음을 만류하는 듯했다. 나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 마감 때까지 앉아 있었고, 결국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동네 골목을 한참이나 빙 돌아다녔다.


어린 시절의 집은 내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규율은 딱딱했고, 어머니의 눈빛은 차가웠다. 나는 집 안에서조차 제대로 이름 불리지 못한 채, 늘 누군가의 시선 뒤편에 머물렀다. 슬픔은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었고, 용기 내어 건넨 말은 공중에서 맥없이 떨어졌다. 방문을 닫아도 무심한 손길 앞에선 금세 열려버렸다. 그 시절의 집은 몸만 머무는 곳이었지, 마음을 숨길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집 안에서도 감정을 억누르는 법부터 배웠고, 집은 나를 쉬게 하기보다 늘 경계해야 하는 장소였다.


성인이 되어 독립했을 때, 비로소 편안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취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조차 마음 둘 구석이 없었다. 낯섦, 외로움만이 쌓여 있었다. TV 소리는 적막을 키웠고, SNS 속 ‘집이 제일 좋다’는 말은 나와 상관없는 세계의 것이었다. 네 평 남짓한 방은 수많은 건물 사이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였다. 벽마다 쌓인 물건들 속에서도 허전함은 줄지 않았다.


카페와 골목길을 헤매던 이유도 결국 이 때문이었다.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꾸역꾸역 집 문턱을 넘었다. 옷을 벗다 거울 속 풍경을 보고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낯섦과 외로움, 허전함이 켜켜이 담긴 사람 하나가 그대로 서 있었다. 모든 것은 나한테서 뿜어 나와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구나. 그제야 내가 왜 이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지 비로소 실마리가 잡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집을 단지 ‘오늘을 지나가는 길목’ 정도로만 여겨왔다. 마음을 내려둘 생각이 없으니, 공간이 익숙해질 여유도 없었다.


요즘은 매일 하는 집안일이 꼭 정리를 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질러진 물건을 제자리에 두거나,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버리는 사소한 행동들이 어느 순간 지금의 나를 살피는 작은 징후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하루의 흔적을 천천히 정리하다 보면, 내가 이 공간을 돌보는 만큼 이 공간도 나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집이 달라지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의 태도가 이 집을 조금씩 안식처로 바꿔 간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10년 넘게 살고 있는 이 집이 여전히 낯설고, 종종 지겹기도 하다. 하지만 낯설다고 떠날 수 없는 곳, 지겨워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 그게 집이 아닐까. 오늘도 현관문을 열고 작은 불빛이 켜진 방 안으로 들어온다.


아주 느리더라도, 이 집이 나를 품고 내가 이 집을 이해하는 속도가 언젠가 서로 닿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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