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오고 있어?
불을 끄면 방 안이 조용해지며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천장에 번지고, 그 빛 아래에서 또 다른 내가 서서히 깨어난다.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미소 짓는 나,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웃는 나, 화목한 가정의 따뜻한 온도 속에 어색함 없이 녹아 있는 나. 상상 속의 나는 현실보다 부드럽고,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현실에서는 온도를 조금만 올리려 해도 끝없이 장작을 넣어야 했지만, 상상 속의 나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세상을 자연스럽게 대했다. 그곳의 나는 행복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 말 한마디에도 다정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 그 온기는 금세 스러지고 방 안의 공기가 다시 제 온도로 내려앉는다. 상상 속의 나와 내가 겹쳐지던 순간은 사라지고, 조용한 현실만 남는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방금 전까지는 아주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손끝에 닿은 이불의 서늘함이 지금 이 자리를 또렷하게 확인시킨다. 나는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온다. 그 순간은 아프다기보다 너무 선명했다.
예전의 나는 상상이라는 세계에서 과거를 탐닉했다. 이미 지나간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순간의 감정, 표정 혹은 온도를 더듬었다. 상상은 내게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다른 형태로 보여주곤 했다. 그 때문에 그 세계는 이상하게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막상 닿지 않는 온도와 표정들이 그 안에만 존재했다. 그곳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나를 구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붙잡으려는 마음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 그리고 오래 머물수록 더 분명해졌다. 그곳은 나를 데려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둬두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요즘의 나는 상상을 조금 다르게 사용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러 가는 통로로 쓴다.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르면, 상상 속의 내가 현실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괜찮았어? 충분히 잘했어. 내일은 어떻게 보내고 싶어?” 마치 친구의 집에 놀러 온 듯, 그녀가 미래에서 잠시 놀러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좋아하는 일을 차분히 해내고, 사소한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나. 상상은 더 이상 내가 도망치는 곳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가 현재의 나를 데리러 오는 작은 방 같은 것이 되었다.
상상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가 너무 클 때, 나는 상상 속의 나에게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른다. 그 몇 초의 가벼움이, 다음 하루를 버틸 작은 이유가 되어준다. 나는 그 순간들을 모아두고, 내일을 조금 덜 무서워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상상은 더 이상 과거를 되감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조금씩 덜 아프게 하는 기술이자, 아직 오지 않은 내가 지금의 내게 조용히 손을 내미는 세계다.
오늘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상상 속의 내가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고 말없이 옆에 앉는다. 상상 속의 내가 건네는 그 조용한 온기는 아직 오지 않은 나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데리러 오길 조용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