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리지 않을 확신보다, 틀릴 자유
정답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불편하다. 모두가 찾아 헤매지만, 정작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전은 정답을 ‘옳은 답’이라 정의하지만, 과연 삶에 그런 답이 정말 존재할까. 나는 그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묘하게 불편하다. 정답이 있다는 건 오답이 있다는 뜻이니까. 어느 유튜버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운동에는 정답이 없다. 오답만 있을 뿐.” 인생도 그럴까.
어릴 적 우리는 정답을 맞히는 걸 당연한 의무처럼 여겼다. 종이 위에는 늘 하나의 답만 있었고, 그 외의 모든 선택은 예외 없이 빗살무늬로 지워졌다. 한 문제로 위아래가 결정됐고, 선생님의 시선이 달라졌고, 나의 미래까지 달라졌다. 빗살무늬가 하나씩 늘 때마다 마음 한쪽에서 게임 속 하트처럼 체력이 ‘톡’ 하고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 작은 소리는 마음을 찌르기엔 충분히 컸다. 틀리는 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몸은 먼저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하루를 간신히 통과하고 나면 나지막하게 말하곤 했다. “오늘도 살아남았군.” 정답만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도 같다.
사회에 나와서도 비슷할 줄 알았다. 모두가 같은 문제를 풀고, 같은 답안을 향해 나아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애초에 문제의 ‘지문’부터 사람마다 다르게 읽는다. 누구는 1번을 고르고, 누구는 2번을 고른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3번과 4번 사이에서 인생을 걸고 망설이고, 애정 많은 사람은 답란에 하트를 그린다.
그리고 꼭 있다. 정답 칸에 뜬금없이 햄버거를 그리는 사람.
더 놀라운 건, 그 햄버거가 그 사람 인생에서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험지를 푸는 줄 알았는데, 실은 각자 다른 문제집을 들고 있었다. 세상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굳게 믿어왔는데, 알고 보니 ‘보기의 형식’부터 애초에 달랐다니,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결국, 나는 정답의 안전함 속에서 ‘틀리지 않을 확신’을 얻는 대신 ‘틀릴 자유’를 내주고 있었다.
정답을 맞히며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난받을 확률이 조금 줄어들 뿐이다. 오히려 정답에만 매달릴수록 삶은 금이 간다. 정해진 길만 걷던 사람이 바로 옆 골목만 들어가도 길을 잃는 것처럼. 어딘가 씁쓸하고, 어딘가 우습기도 하다. 뭐랄까. 남들 따라 길게 줄을 섰다가, 내 차례가 돼서야 그곳이 밥집이 아니라 옆 빵집 줄이었다는 걸 깨닫는 기분이랄까.
아버지는 관광지를 갈 때마다 늘 말했다. “길을 잘 모르겠으면 일단 사람이 많이 가는 곳으로 가.” 타고난 길치인 나는 그 말을 지금까지도 잘 써먹고 있다. 하지만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그 길은 그저 ‘길을 잃지 않는 법’ 일뿐,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남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가이드가 아닌, 결국 흔한 관광객으로만 남게 된다. 이왕 걸어갈 거라면, 남의 가이드를 따르기보다 내가 스스로 가이드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선택에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다. 정답은 다수의 안심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산물일 뿐, 삶의 본질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해는 동쪽에서 뜨지만, 우리의 선택은 사방 어디에서든 불쑥 날아올 수 있다. ‘옳음’이라는 말도 결국 인간이 정해놓은 기준일 뿐이다. 사회가 금기로 정한 몇 가지 오답만 아니라면, 그 밖의 모든 선택은 각자의 인생에서 충분히 정답이 된다.
우리에겐 가이드가 필요 없다.
지도의 바깥으로 걸어 나갈 배짱이면 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저 오답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