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래도 어쩌겠어

45억 년째 도는 지구처럼, 우리 안의 '미세한 업데이트'를 믿기로 했다

by 골골


요즘 내 하루는 Ctrl+C, Ctrl+V 같다. 아침 알람이 울리면 기계적으로 화면을 밀어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야 몸을 일으킨다. 일을 쉬고 있지만, 하루를 통째로 비워두는 게 왠지 어색해 빈속에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부터 켠다.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다 갑자기 청소기를 돌려 방 한구석만 반짝 빛나게 만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면 또 멍하니 화면을 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하루는 묘하게 분주하게 흘러간다. 정작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늘 같은 장면만 반복해서 이어 붙인 듯하다.

가끔은 이 지루한 반복을 깨보려 작은 일탈을 시도한다. 늘 배달로 시키던 걸 직접 마트에 가서 사보고, 늘 가던 카페를 지나쳐 어색하게 생긴 동네 카페에 들어가 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날은 꼭 실패한다. 마트에서 사 온 재료는 냉장고 깊숙이 밀려 며칠 뒤 버려지고, 처음 가 본 카페의 커피는 이상하게도 맛이 쓰기만 해 반 이상 남긴다. 결국 다시 배달을 시키고, 원래 가던 카페로 돌아간다. 익숙한 맛과 예측 가능한 자극이 결국 나를 제자리로 데려온다. 나의 일탈은 늘 하루짜리다.


저녁 무렵, 사람들이 퇴근하는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불규칙한 경적과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하루가 끝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급해진다. 하루를 탕진한 것처럼 한 게 없어서, 급하게 운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몸을 이끌고 헬스장에 간다. 어제와 같은 무게를 들고, 같은 호흡을 내쉬고, 같은 타이머를 눌러가며 운동을 반복한다. 세트 사이에 숨을 고르며 무심코 거울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게 변하는 중인지, 그냥 되감기만 하는 건지. 운동이라기보다 ‘오늘 할 일은 했다’라는 안도감을 위한 숙제 같다. 그래도 안 하면 오늘 하루를 허공에 날린 것 같아 묘한 찝찝함이 남기에 시간을 다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샤워하고 젖은 머리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면 방 안의 공기는 늘 그렇듯 고요하다. 정적을 밀어내듯 TV를 틀면, 저번 주에 보던 드라마의 재방송이 흘러나온다. 그 옆 책상엔 며칠 전부터 쓰다 만 다이어리가, 언제나 그렇듯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복되는 하루, 반복되는 마음, 반복되는 고민들. 그렇게 또 하루가 접힌다. 별일 없었는데도 어쩐지 피곤하다. 내일도 비슷하겠지. 웃기기도 하고 좀 한심하기도 하다. 살아 있긴 한데, 뭔가 시스템 오류 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지구는 45억 년째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뱅뱅 돌고 있고, 이 되풀이되는 하루 속에서도 지구의 자전에 맞춰 하늘의 별들도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 안, 지구 안, 하물며 아주 작은 내 안에서도 미세하게 ‘업데이트’가 되고 있지 않을까?

일탈은 실패했지만, 실패했다는 걸 아는 나는 어제의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니까 말이다. 글이 잘 안 써져도 다시 앉는 나, 운동이 지겨워도 몸을 움직이려는 나, 익숙한 루틴 속에서도 조금은 덜 괴로워하는 나. 수많은 나들이 모여 작지만, 분명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오늘도 무사했으니까.


내일도 이 정도면, 살아볼 만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오늘을 살아낸 나에게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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