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도시에서 시골처럼 걷기

시골을 품고 자란 사람만 누릴 수 있는 비밀 버프

by 골골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틀면 화면 밖으로 흙 내음이 번져와, 도시에 지친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서울은 계절이 바뀌어도 온도만 달리할 뿐 풍경은 늘 무채색이라면, 그 영화 속 시골은 계절마다 다른 빛과 향을 입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첫 장면이 천천히 펼쳐진다. 하얀 숨결이 피어오르는 겨울, 눈 속에서 언 배추를 캐고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는 장면이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따스한 수증기가 화면을 채우면, 내 마음도 조금씩 데워지는 듯했다.


그 장면 위로, 내 어린 시절의 시골이 자연스레 겹친다. 무심하게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며 마당을 밝히고, 비 온 뒤 물웅덩이를 퐁당 밟고 놀던 오후가 있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어김없이 지나가던 어르신 한두 분이 “어디 가니?” 하고 알은체하던 그 목소리.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마법의 가루라도 뿌려진 걸까. 벌레떼와 싸우며 허우적대던 몸짓, 멀리서 ‘아악—’ 울어대던 고라니 소리까지도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은 이유 없이 더 반짝거렸다. 아마 그 반짝임 덕분인지 내 마음 한쪽은 여전히 그 시절의 느림에 기댄다. 그 시간은 늘 한 박자씩 늦게 흘렀고, 심심하다는 말이 일상의 절반이었지만 그 심심함 속에서 나는 자주 충만해졌다.


서울살이 14년째, 나는 여전히 도시의 속도에 발이 맞지 않는다. 새벽 첫 지하철이 굴러가면 내 하루도 함께 밀려간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정과 다급한 사람들 속에서 내 걸음은 도시의 리듬에 미끄러지는 음표처럼 불안정해진다. 애써 따라가 보지만 마음은 늘 뒤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그 여유가 자주 그리워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동 슈퍼 트럭이 ‘빠앙—’ 하고 경적을 울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던 풍경, 짜장면 한 그릇을 위해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논두렁을 걷던 시절, 가로등이 꺼지면 별빛이 쏟아지며 길을 밝히던 밤이 떠오른다. 요즘의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장면들이다. 어쩌면 나는, 시골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한 조각의 빛을 슬쩍 품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남들은 평생 몰라 지나칠 풍경을 나는 알고 있으니, 괜히 주머니 안에서만 반짝이는 비밀 보석 하나쯤 가진 것 같아 슬며시 우쭐해진다.


나는 여전히 서울 한복판의 좁은 자취방에 산다. 가끔은 승진 소식이나 돈 걱정에 흔들리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가장 편안한 속도는 느린 쪽이다. 약속 장소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골목길을 걷고, 길가의 들꽃에 눈길을 멈춘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며, 하루의 리듬을 내 호흡에 맞춘다.


이렇게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 속에서, 나는 오늘도 시골의 시간으로 걷는다.

도시의 리듬과 엇박자를 이루며, 천천히 나만의 느슨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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