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또 무슨 우연, 무슨 인연

지독한 운명

by 민시

유독 고단한 하루가 지나고 주말 아침,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더위 먹은 듯 기운이 없었다.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쉬는 날이라고는 없었으니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옆 동네 카페 사장님의 따님 결혼식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뭐, 그냥 그렇다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몸이 힘들다는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내 몸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나하나 재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 생각만으로 몸을 일으켰다.


1층으로 내려가 에어컨부터 켰다. 그다음 커피 머신의 전원을 켰다. 잠시 핑글, 머리가 몽롱했다. 그대로 멈췄다. 눈을 끔벅끔벅, 빠르게 정신이 돌아왔다.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빗자루를 들고 구석구석 쓸어냈다. 문밖으로 한 발짝 나가니 또다시 몽롱한 게, 잠시 휘청일 틈도 없이 벽에 기대어 섰다. 눈을 감고 벽의 온도를 빨아들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뜨듯한 바람은 어느 공사장에서 실려 왔는지, 옅은 모래 냄새가 콧속을 노리듯 들어왔다. 정신 차리려 눈을 크게 뜨고 곧게 섰다. 달갑지 않은 듯 킁킁, 그대로 들어왔다.


카페인이 당기지 않았다. 얼음 컵을 집어 들었다. 제빙기에서 얼음을 한가득 담았다. 하나 입에 넣고, 나머지는 빙수기로 가져갔다. 갈갈갈, 으레 하는 일인 양, 응당 따라오는 대가처럼 받아냈다. 티스푼을 들고 한 움큼 입에 넣었다. 마치, 신생아 분유 털어 넣듯이. 달디단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졸다 깬 사람처럼 놀라 눈을 떴다. 픽업 창밖으로 밝은 햇살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자꾸만 끔벅거리며 감기는 눈, 원두 그라인더를 작동시켜 소음을 일으켰다. 들리지 않았다. 눈만 감겼다. 에스프레소 추출 버튼을 눌렀다. 또 눈만 감겼다.

“똑똑”

잠시 후, 픽업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섰다. 쭈뼛대며 말을 더듬는 남자 손님의 주문을 받았다. 따듯한 커피 한 잔과 아이스 두 잔.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이 급해 보였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개를 흔들며 피로를 털어냈다. 정신 차리고 커피 세 잔을 내렸다. 건넸다.

“감사합니다.” 손님의 눈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입가는 수줍게 올라갔다.


“띠링”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언니~!” 혜리였다. 몽롱한 상태로 눈만 끔벅끔벅, 혜리의 어깨너머로 과거가 보였다. 꿈이겠거니, 전 남자 친구는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눈을 떴다. 어수선했다. 익숙한 커피 향이 아니었다. 모래 냄새도, 카페도 아니었다.

“언니~! 괜찮아요? 정신 들어요? 여기 병원이에요.” 다시, 혜리였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눈을 꿈벅이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천장 모서리를 콕콕, 찍어 눈에 담았다. 정신이 들 때쯤, 누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전 남자 친구였다. 꿈이 아닌 현실, 기가 막힌 현실, 이건 또 무슨 우연, 무슨 인연.

“오빠, 나 1층 카페에 있을게. 충분히 이야기하고 와.” 혜리는 말하며 돌아섰다. 상황 파악이 될 때쯤, 돌아선 혜리의 뒷모습만이 또렷이 보였다. 전 남자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빈혈이래. 혜리랑 카페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전 남자 친구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괜찮아.”

이미 오래 봐왔으니,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 남자 친구는 충분히 자리를 지켜주고 떠났다.


눈물도 안 났다. 당장 카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리 살기 좋은 세상이라도, 2층이 주거 공간이니까. 그 누구에게도 허접한 공간은 보이기 싫었다. 엄마가 오셨다.

“언제 또 연락했대?” 아무렇지 않게 나온 대답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빈혈 가지고 엄마가 왜 보고 싶어?” 엄마야말로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더 안정감이 느껴졌다. 보고 싶다는 핑계라.. 전 남자 친구다웠다.


엄마와 함께 카페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렸다.

“나 그냥 가게 접고 엄마랑 살까?”

“미친 기지배, 들인 돈 다 수거하고 와.” 엄마는 의외로 냉정했다. 당연했다. 이게 우리 엄마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페 문을 닫았다. 다시 밖으로 향했다. 모처럼 만에 엄마와 외식하기로 했다.

“민혁이는~! 다시 만나는 거야~? 전화하더니 코빼기도 안 보여, 왜~?” 엄마는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는 게 나았다.

“안 만나. 그냥 친구 하기로 했어.”

엄마는 못내 아쉬운 듯 대답 없이 물을 마셨다. 뒤이어 젓가락 들어가며 반찬만 오물거렸다.


엄마와 헤어지고 카페로 향하는 길,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다. 핸드폰을 빤히 쳐다봤다. 전화 연결음 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어우~ 사장님~ 바빴나 봐~!” 좋은 날은 좋은 날이었는지, 옆 동네 사장님 목소리는 밝았다.

“죄송해요~ 따님 결혼식도 못 가고~!”

“괜찮아요~! 바쁠 때 바짝 벌어놔야 해요, 우리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축하드려요~ 따님 행복하게 살 거예요~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사장님~! 네~! 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으며 눈앞에 우연히 나타난 정민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오늘 쉬는 날인가 봐요~”

“아~ 네~ 오늘만요~ 그렇게 됐어요~ 내일부터는 다시 문 열 거예요~”

어쩐 일인지 그녀는 밝게 웃어 보였다.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전 남자 친구는 마주치지 않았다. 혜리도 더 이상 카페를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