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모서리의 마음을 빌려온다면

by 고양이

종이는 무른 몸을 가졌으면서도 때로 칼보다 서늘한 날을 세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내가 이토록 많은 종이를 만지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얇은 종이들을 매일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복사기에서 갓 뱉어낸 A4 용지는 오븐에서 꺼낸 빵처럼 기분 좋은 온기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그 온기에 방심해 손을 뻗는 순간 종이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끝을 베고 지나간다.


날카롭지만 무딘 감촉. 붉은 선이 그어지고 뒤늦게 배어 나오는 열감과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그 묘한 후련함을 과연 통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쓰라린 손가락을 갈무리하며 다시 종이 뭉치를 정돈한다.


수업이 한창이던 오후 한 아이가 교탁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얇게 갈라진 상처 위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연필을 깎다 그랬나, 아니면 방금 나누어준 유인물에 베인 걸까.’

짧은 찰나에 머릿속으로 몇 가지 추측이 스쳤다. 그러나 아이의 다른 손가락들을 본 순간 나의 얄팍한 짐작은 비참하게 부서졌다.

마디마디마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치대다 손가락 사이에 엉겨 붙은 덩어리들처럼 상처와 딱지들이 층층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고통의 흔적이었다.


내 안의 둔한 감각들 사이에서 유독 비겁할 정도로 예민하게 자라난 ‘눈치’라는 녀석이 신호를 보냈다. 아이의 손가락이 아닌 그 위쪽을 보라고. 교복 셔츠 소매 끝. 얇은 천 밑으로 비치는 살갗에는 오래되어 하얗게 변한 흉터부터 갓 아문 붉은 자국까지 무수한 선들이 겹쳐진 채 지형도를 그리고 있었다.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 혹은 더 견고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이를 보건실로 보내고 다시 교탁 앞에 섰을 때 나는 한동안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교실 안에서 내 심장 박동 소리만이 선명했다. 사람이 당황하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비유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그제야 절감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보건실과 담임 선생님께 상황을 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끝내 할 수 없는 일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마음 한구석에서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꺼지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나는 서류를 묶고 나누어주고 다시 걷는다. 손 끝에 닿는 종이의 가장자리가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지는 오후다. 만약 세상의 모든 종이가 둥근 모서리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아이의 손등 위로 지나는 바람도 내가 건네는 서투른 마음도 조금은 덜 아플까.


부질없지만 간절한 생각을 종이를 말듯 둥글게 말아 접어 본다.

월요일 연재
이전 04화누가 내 커피에 설탕을 넣었을까.